[신규진의 교육 성장] 공부는 왜 하는가? (15)
맛있는 공부
기사입력 2014.11.25 08:57
  • 자아(自我)의 독립은 자유인으로서 행복해지기 위한 인생의 필수 과업이다. 독립하지 못한 자아는 정서적으로 매여 있고 관습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좋아하는 일을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한다. 그래서 원하지 않는 등짐을 오랫동안 지고 살게도 된다.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지만, 나 자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부모도 역시 타인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부모와 애착으로 조여 있던 관계는 성장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느슨해져야 한다. 그리고 청년에 이르러서는 온전히 독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족주의에 집착이 강한 가정의 자녀는 자아 독립 과정에서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부모가 자녀의 성공이나 실패를 자신의 것처럼 동일시(同一視)하며 자녀의 인생을 직접 설계하고 관리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 경우 부모의 기본 정서는 자녀와 미래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다. 그래서 자녀가 어떤 성취를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목표나 조건을 제시한다. 대학에 입학하기만 하면 자유를 주겠노라 자녀에게 공언한 경우에도 그 약속이 지켜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부모의 강요와 통제가 심한 경우 자녀는 크게 분노하거나 심지어 증오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럴 때 ‘내 탓이다.’하고 반성하며 전환을 꾀하는 부모도 있지만, ‘네 탓이다.’하고 자녀를 신경정신과에 데려가는 부모도 있다. 자아의 독립이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누구나 후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 허나 자아 독립은 한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에서 정신적 존재로 도약하는 것이므로 생명의 재탄생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청소년 자녀가 선택의 자유를 주장할 때 부모는 최대한 그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 순리이다.

    부모와 자녀는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실망할 때 받는 정서적 상처가 깊고 오래 가게 마련이다. 그래서 청소년 시기에는 부모의 강요와 통제에 대해 분노하고 일탈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어른들은 대개 아이가 철이 없고 미성숙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일견 맞는 말이다. 철이 없고 미성숙해서 비효율적인 투쟁으로 아름다운 젊음을 소진하고 있으니 말이다. 허나 심청이라면 모를까 부모의 불완전함마저 존경하고 사랑하라는 요구를 순순히 수용하기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부모의 강압적 태도에 투쟁적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흔히 그러하듯이, 공부를 때려치우거나 가출을 반복하는 식의 저항은 상처 입은 아이로 남고자 할 때나 쓰는 퇴행적 방법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어른의 벽을 넘을 수 없고, 독립이 아니라 고립의 길로 내몰릴 가능성이 더 많다. 어른을 이기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어른보다 더 큰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른을 넘으려면 분노의 마음부터 없애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의 허상을 걷어내고 그 속을 들여다봐야 한다. 부모라는 어른은 결코 자식에게까지 지면서 살기는 싫은 자존심의 존재이다. 또한 수많은 상처가 있어도 자식에게는 차마 내보이지 못하는 아픔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부모의 근엄한 척하는 속내에는 이루지 못한 욕망과 그로 인한 결핍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 결핍이 대물림될까봐 강한 척 센 척하며 살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겁 많은 어린 아이가 살고 있다는 것도 간파해야 한다.

    이해하면 분노가 가라앉고, 분노가 사라지면 공감할 수 있고, 공감하면 포용할 수 있다. 부모를 있는 그대로 포용할 때 비로소 자아 독립이 가능하다.(16회에서 계속)

    ≪바라지 않아야 바라는 대로 큰다≫ 외 다수 저술 / 2012 올해의 과학교사, 2006 서울시 우수 상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