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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베른하르트 슐링크(Bernhard Schlink, 1944~)는 소설 ‘책 읽어 주는 남자(Der Vorleser; The Reader)’를 통해 편견(偏見)과 광분(狂奔)의 사회에서 무지(無智)와 무지(無知)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일인가를 잘 그려내었다.
주인공 한나는 자신이 문맹(文盲)임을 밝히기만 하면 종신형을 언도받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무지(無智)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누명을 쓴 채 감옥에 갇힌다.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한나는 각고의 노력으로 문맹의 무지(無智)에서 벗어나지만, 동시에 자신의 무지(無知)에 대해서도 깨우친다. 아우슈비츠의 간수로 나치 독일에 충성했던 일이 얼마나 끔찍한 죄였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석방을 하루 앞두고 그녀는 목을 매어 자살함으로써 자신의 무지(無智)와 무지(無知)에 대한 판결을 스스로 집행한다.
‘내가 얼마나 무지(無知, ignorance)한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류의 지식은 수많은 천재들에 의해 수정되기를 거듭하여 왔지만, 하이젠베르그(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이르러 인간의 인지방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안개와 같은 모호함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은 언어로 이해되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자고 했다.
반면 ‘내가 얼마나 무지(無智, illiteracy)한가’에 대해서는 도서관 열람실에 서 있을 때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무지(無智)는 인류의 축적된 지식에 대해서 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이는 무지(無知)보다는 상대적이고 좁은 의미의 무식이다. 보통 우리는 무지(無智)한 것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래서 글을 배우고, 산술을 익히고, 악기와 춤과 운동을 연마하기 위해 학교와 학원과 도서관에 간다. 또한 가족과 친구, 이웃과 친지, 스승과 제자 등 나를 둘러싼 모두로부터 배운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불완전하며 무지와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에는 여백이 필요하다. 이것은 맞고 저것은 틀렸다는 흑백논리식 지식을 비판 없이 따라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학벌이나 지위, 명예 따위를 성취했을 때 갖기 쉬운 오만과 편견은 특히 큰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 이는 운전 좀 한다고 자부하기 시작했을 때 저지르는 교통사고처럼 여러 사람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히틀러는 탁월한 웅변 솜씨로 나치 독일의 총통이 되었고, 1939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편견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세계인에게 참혹한 상처를 입혔다.
천재라고 불렸던 과학자와 발명가들은 오늘날의 과학문명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선봉에 선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미래에는 물도 사먹게 될 것이다.”라는 과학 선생님의 말에 학생들이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맑은 물이 펑펑 쏟아지는 우물이 있었으니 그 말이 황당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네에 공장 몇 개가 들어서는가 싶더니,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주변의 산천초목을 모조리 말려 죽이고 말았다.
인류는 도시와 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지구 온난화를 초래했고, 이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는 소행성의 지구 충돌에 버금가는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남극의 얼음이 모두 녹는다면 세계의 해수면이 60미터나 상승하여 해안 도시는 모두 사라질 것인데도 사람들은 그 심각성을 잘 모른다. 엄밀히 말해 인간이 만들어내는 생산품들은 모두 미래의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시멘트로 버무리거나 쇳덩이로 만들거나 백 년 천 년 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태울 수도 없고 우주에 내다 버릴 수도 없는 원자력 폐기물은 그득하게 쌓여 이제 보관할 장소마저 없는 상태이다.
무지와 편견으로 빚어진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그래도 학문밖에 없다. 명심해야 할 것은 지식의 파편들을 넓은 안목으로 융합하지 않으면 지식이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점이다. 통합과 융합의 과정에는 여러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다. 독단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의 무지와 편견을 극복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늘 겸손한 자세로 배우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회에서 계속)
≪바라지 않아야 바라는 대로 큰다≫ 외 다수 저술 / 2012 올해의 과학교사, 2006 서울시 우수 상담교사
[신규진의 교육 성장] 공부는 왜 하는가?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