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진의 교육 성장] 공부는 왜 하는가? (2)
맛있는공부
기사입력 2014.08.12 10:13
  • 외할머니(1914~1987)는 어린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슬픈 일이 ‘배고픔’이라고 하셨다. 공부는 왜 하는 것이냐는 물음에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셨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여자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야했던 그녀에게는 배우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恨)이었다. 외할머니는 인생 말년에 아라비아 숫자를 겨우 익혔는데, 혼자 힘으로 노선버스를 타던 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사람다운 것’이 무엇일까?

    사물 또는 다른 생명들과 사람이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은 사람이 ‘생각(thinking)’하는 존재이며 ‘발명(Invention)’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생각’을 뇌의 신호처리 정도로 단순하게 이해한다면, 고양이나 쥐도 생각한다고 할 수 있다. ‘쟤를 어떻게 잡을까’, ‘쟤를 어떻게 피할까’하는 정도의 본능적인 생각은 동물들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를 고민하는 것은, 동물과 뚜렷이 구별되는 고차원의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의 생각(thinking)에는 ‘왜 그럴까?’하는 사유가 포함되어야 한다. 거기에 ‘꼭 그래야 하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더해지면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가 되고, ‘이렇게 하면 어떨까?’하는 발상이 더해지면 ‘창조적 사고(creative thinking)’가 된다. 특히 공부하는 사람의 생각에는 이러한 비판적 사고와 창조적 사고가 뒤따르게 되어 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받는 교육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학습자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

    첫 번째 불만족은 학교 교육이 대중급식소의 음식처럼 제공되는 데서 비롯된다. 학교 교육은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지 않으며 학생들은 미리 짜인 교육과정대로 배우게끔 되어 있다. 학년이나 나이가 같다고 해서 발달속도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인데, 이와 같은 개인차 역시 고려되지 않는다. 음악이나 체육처럼 개인이 더 좋아하는 과목이 있어도 그것을 더 많이 하도록 배려해주지도 않는다. 몸이 아파서, 집안에 우환이 있어서, 또는 대인관계에서 오는 신경증이나 기타 정신적인 고통 때문에 수업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을 때에도 학교 수업은 정각에 떠나는 열차와 같아서 뒤처진 승객을 기다려주는 법이 없다.

    두 번째 불만족은 학교 교육의 목적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데서 비롯된다. 사회학자 뒤르케임(Émile Durkheim. 1858~1917)의 말을 빌리면, ‘교육은 사회의 집단의식을 아동에게 물려주는 사회화 과정’이다. 학교는 사회라는 유기체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교육과정을 구성하게 된다. 약간의 우월감과 적절한 열등감을 동시에 가진 일꾼이 많아야 사회가 융성한 문명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모두를 여왕개미로 키우는 식의 교육과정은 애초부터 만들어지지 않는다. 학교 교육은 학습자로 하여금 무엇을 알도록 가르치는 동시에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1)를 알려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의 기능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일개미로 태어난 개미는 그 임무에 충실할 뿐이지만, 사람은 사유하는 존재이므로 ‘나는 왜 여왕개미가 될 수 없는 것인가?’하는 의문으로 불만을 품는다.

    학교 공부가 지겹다는 생각이 들 때 유익한 것은 내가 ‘진짜 공부’를 한 적이 있는지 자문하는 일이다. 단어나 공식을 외우는 것은 공부를 위한 준비 과정일 뿐 진정한 공부라고 할 수 없다. 세상 구경을 떠나기 위해 전날 밤 짐 꾸리는 과정이 학교 교육이라고 생각하면 자신이 왜 학교 공부를 지겨워했는지 대충 감이 올 것이다.

    1)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메타인지(meta cognition)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오만, 편견, 그릇된 믿음에 빠지지 않도록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3회에서 계속)

    ≪바라지 않아야 바라는 대로 큰다≫ 외 다수 저술 / 2012 올해의 과학교사, 2006 서울시 우수 상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