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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융 상태의 마그마가 점차 식어갈 때 구성 성분이 분리되며 차례로 여러 광물이 만들어진다. 광물 입자의 크기는 마그마의 냉각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빠른 속도로 냉각되면 좁쌀보다 작은 알갱이에서 성장을 멈추고, 천천히 냉각되면 동전보다 더 큰 결정으로 자란다. 이와 같은 과정이 마그마의 분화 작용이다.
자아(自我) 역시 용융되어 있던 가족의 정서로부터 분리되어 홀로서기가 가능해질 때까지 분화 작용을 거친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나다.”라는 당당한 확신이 설 때까지이다. 자아 분화는 어린 시절부터 시나브로 진행되어 법적 성인이 되는 스무 살 즈음에 상당한 수준에 올라서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부모의 간섭과 통제가 심한 가정에서는 자녀가 자아 분화에 어려움을 겪는다. 간섭과 통제는 사랑이 아니라 불안한 자아상을 자녀에게 투사하는 것이지만, 부모는 이를 이성적으로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
가족심리학자들은 가족의 정서가 개인별로 분화되지 못하고 하나로 뭉쳐 있는 상태를 융합(fusion)이라고 부른다. 엄마가 울 때 아이도 함께 따라 우는 경우가 융합된 정서의 한 예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함께 울어주는 존재가 있어서 한편으로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엄마의 감정에 따라 함께 울고불고한다면 이를 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내 기분이 안 좋을 때 가족들에게 짜증을 내는 것도 융합된 정서에서 비롯되는 현상 중의 하나다.
대입공동체라는 자조적인 별명이 붙어 있는 우리나라 가정에서는 학벌을 따기 위한 공부가 자아 분화를 방해하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학벌공부는 마치 가족의 한 사람처럼 군다. 매사에 끼어들어 가정의 대소사에 참견할 뿐만 아니라, 이민을 떠나게도 하고 심지어는 생명을 위협할 때도 있다. 성적표에 적힌 숫자가 실질적인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닌데도 아이가 깊은 좌절감을 느끼는 것은 부모의 감정이 자녀에게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융합된 정서는 파동처럼 증폭되는 특성이 있어 심리적 고통을 배가시킨다. 낮은 성적표를 받아 속상한 마음에 부모의 낙담과 한숨까지 더해질 때, 아이는 자신의 무능함뿐만 아니라 가족을 슬프게 했다는 자괴감에 더욱 힘들고 고통스럽다.
이처럼 자아 분화 수준이 낮으면 자기 감정에 타자인 가족의 감정까지 얹어서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늘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식구들이 서로 무신경한 척하는 긴장 관계로 발전하거나 남남처럼 단절된 관계가 되기도 한다.
건강한 가족은 각자가 독립적이면서도 화목한 관계를 유지한다. 서로의 정서를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결코 하나처럼 굴지 않는다. 건강한 가족을 만드는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그렇지만 자녀도 가족 구성원으로서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태도가 경청이다. 경청은 능동적인 듣기로서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화답하는 과정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부모가 나의 모자람에 대해 짜증내거나 나무랄 때, “제가 많이 부족하지요. 더 노력할게요. 지켜봐 주세요.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경청이다.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수용의 태도이고, 노력하겠다는 것은 반영의 태도이며, 지켜봐 달라는 것은 청원의 태도이고, 보답하겠다는 것은 감사의 태도이다. 이처럼 부모의 짜증에 동조하지 않음으로써 자아 분화는 촉진된다.
부모와의 융합에서 벗어나 자아 분화 수준이 높아지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보다 넓은 세상으로의 여행이 수월해진다. 이때 찾게 되는 것이 사랑이다. (17회에서 계속)
≪바라지 않아야 바라는 대로 큰다≫ 외 다수 저술 / 2012 올해의 과학교사, 2006 서울시 우수 상담교사
[신규진의 교육 성장] 공부는 왜 하는가?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