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숙의 엄마 영어 학교] 아이들 뇌가 거부하는 영어
조선에듀
기사입력 2018.10.23 17:41
  • 영아기에 영어를 시작한 진우(가명)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각종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1등을 도맡아 할 정도로 성공적인 조기 영어교육 사례로 손꼽혔다. 만 3세 이전에 두 개의 언어 체계를 만들어주려던 엄마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주변 엄마들은 진우를 ‘영어 영재’라고 부르며 부러워했다. 그런 진우가 5학년이 되면서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뇌 정밀검사를 통해 내려진 진단은 감정을 조절하는 뇌 부분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는 것이었다. ‘조급한 부모가 아이 뇌를 망친다’(신성욱 지음)에 등장하는 사례 중 하나다.

    진우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영어 음악과 스토리를 들었고 생후 18개월부터는 베이비 아인슈타인이나 세서미 스트리트와 같은 교육용 영상물과 영어 책을 읽으면서 자랐다. 영어에 대한 노출을 최대한 늘리려는 엄마 계획에 따라 하루 종일 영상을 보면서 지내기도 했다. 만 2세가 넘어가면서는 영어 어린이집에 다녔다. 요즘 엄마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영어 습득 과정일 뿐인데 진우의 뇌는 왜 병이 났을까?

    진우의 발병 원인은 과도한 인지학습으로 인한 스트레스라고 한다. 미국의 뇌 과학자 폴 맥린이 내놓은 뇌의 삼위일체 이론(Triune brain theory)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생명 유지를 위한 뇌, 감정을 관장하는 뇌, 생각과 언어를 담당하는 뇌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 개의 뇌가 각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잘 협력할 때 우리는 감정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는 전인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진우의 경우에는 감정과 생각을 담당하는 뇌가 미처 발달하기도 전에 어린 뇌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정보가 쉴 틈 없이 입력되었고 이로 인해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컴퓨터에 설정된 용량 이상을 저장하면 셧다운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조급한 부모가 아이를 망친다’라는 책을 읽고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여기에 등장하는 사례들이 특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긴장하면 머리가 하얗게 정지돼 버리는 아이, 손톱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물어뜯는 아이,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아이, 금방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선생님 말에 집중을 못하는 아이, 별 이유 없이 친구를 때리는 아이 등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교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야기다. 이런 경우 더 큰 문제는 부모가 아이 상태를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이다. 가정에서는 아이의 일탈적인 행동을 볼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엄마들과 아이의 이상 행동에 대해 상담을 하면 대개 가정에서 그런 일이 없으므로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전두엽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아이들은 자신의 이성으로는 스트레스를 다스릴 수 없다. 양육자가 입력 정보의 양을 조절해줘야 한다. 이런 과정 없이 아이가 지속적으로 지나친 정보에 노출되면 아이의 뇌는 각 부분이 서로 비정상적인 대응 고리를 만들어 정상을 벗어나게 된다. 그 결과 이성적 판단 능력이 떨어지고 외부 상황에 과잉반응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 과잉반응이 후천성 자폐 등의 발병 원인이며 불안, 충동성, 폭력성, 집중력 저하, 공감 능력 부족, 문제 해결 능력 부족과 같은 다양한 증상으로 외부로 표출된다고 한다. 

    뇌가 충분히 발달한 어른은 학습과 노력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영유아기의 뇌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부분 이외에는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자연 그대로의 뇌가 주변 환경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낯선 세상에 적응하고 있다. 생각의 뇌가 눈을 뜨기도 전에 어른들도 견디기 어려운 학습 과정을 강요하는 것으로 아이 뇌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정말 영어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역설적이지만 영어 잘하는 아이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연주의 교육사상가 루소가 그의 유명한 저서 ‘에밀’에서 주장한 대로 아이가 자연 상태 그대로 자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래도 영어를 가르치고 싶다면 아이가 생존을 위해 필요할 때마다 생활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한다. 아이에게 생존을 위한 환경이란 부모와의 교감이나 놀이가 될 것이다. 물론 놀이라고 해서 끊임없이 노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심심한 시간도 놀이의 일종이다. 아이는 지루한 시간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할 일을 찾아낼 수 있다. 미국 워싱턴대학교 마커스 레이클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아무런 외적 활동을 하지 않고 멍 때리고 있을 때 뇌는 필요한 정보와 불필요한 정보를 분류해 저장할 건 저장하고 버릴 건 버리는 작업을 수행한다고 한다. 이 작업을 통해 뇌가 비워지고 새로운 정보를 저장할 공간이 생긴다.

    영어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린 아이의 뇌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양을 입력하고 뇌가 이를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한다. 그래야 입력된 영어가 숨을 쉴 공간을 확보해 쑥쑥 자라나고 창의적인 언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 現)한국항공전문학교 교수 (‘엄마 영어 학교’ 저자)
    前)스탠포드어학원 강사
    前)두란노교육 이사 및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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