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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음식점에서 다들 한 번씩 하는 고민이 있다.
“자장면 먹을까? 짬뽕 먹을까?”
오죽하면 짬짜면이라는 메뉴가 다 나왔을까. 나는 자장면을 선택했는데 막상 음식이 나오니 친구의 짬뽕이 더 맛있어 보인다. 게다가 그날따라 짬뽕이 맛있다며 후루룩거리기라도 하면 ‘잘못한 선택’에 괴로움마저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막상 짬뽕을 먹었어도 상황은 비슷할 수 있다. 그때는 또 자장면이 탐날 수 있으니까. 또한 친구가 짬뽕을 유독 맛있게 먹는 건 어제 과음을 해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오늘따라 내가 시킨 자장면이 맛이 없어서 친구의 짬뽕이 탐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나처럼 짬뽕보다는 자장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뭐야, 별 고민을 다 하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이런 고민을 중국 음식점에서만 하는 걸까?
우리는 항상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매번 무엇을 선택할까 갈등하고, 때로는 선택 후에 괴로워한다. 그게 짬뽕과 자장면을 놓고 하는 정도의 갈등이라면 문제도 아니다. 문제는 그보다 훨씬 중대한 결정을 해놓고 다른 선택을 탐내게 될 때다.
이를테면 친구와 나는 각기 서로 다른 전공을 선택했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보니 나와 다른 선택을 한 그 친구가 나보다 좋은 직장을 다니고, 나보다 좋은 차를 타고, 나보다 나은 배우자와 결혼하고, 나보다 좋은 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럴 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왜 나는 이것밖에 안 되지?’, ‘내가 그 녀석보다 못한 게 뭐지?’, ‘내가 학교 다닐 때 저 녀석보다 공부 잘했는데’, ‘그 녀석은 부모 잘 만난 것밖에 없잖아’, ‘저 녀석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야’, ‘어쩌다 전공하나 잘 선택한 것 밖에 없잖아’ 등등의 무수한 상념이 떠오를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런 식의 비교를 골백번도 넘게 한다. 모든 게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지고 곧이어 상대적 박탈감이 찾아든다.
예를 들어 당신이 오랜만에 동창회에 나갔다. 사실 가뜩이나 기대했던 진급에서 탈락해 실망한 차에 옛 친구들과 기분이나 풀려고 나간 자리였다. 그런데 그날 하필이면 학창시절에 싫어하던 친구가 모임에 나왔다. 이번에 대기업 임원으로 진급했다며 한턱 쏘겠다고 한다. 친구들은 그 녀석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만일 여러분이라면 그 때 그 기분이 어떨까.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녀석이 성공해서 벤츠라도 끌고 나오면 누구나 배알이 뒤틀리게 마련이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상황임에도 분노가 끓어오르고 열등감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치욕까지 느낀다.
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많은 학생들이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을 지칭하는 유행어. 예를 들어 외모도 좋고, 공부도 잘하고, 집안과 인격도 두루두루 다 좋은 사람을 뜻함) 신드롬’에 시달린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니 친구도 잃고, 자신감도 잃는다.
그렇다면 자장면을 선택한 뒤에는 자장면에 만족하고, 짬뽕을 택한 뒤에는 짬뽕에 만족하고 지내는 방법은 없는 걸까? 물론 있다. 상대의 상황이나 말에 대해 쓸데없는 감정이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된다. 자기 처지를 비참하게 느끼는 순간 그것이 더 큰 화를 부르기 때문이다.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배 아파하지 말고 그냥 보내줘라. 조금 늦더라도 한 걸음씩 꾸준히 가면 언젠가는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라. 언젠가는 나무 밑에서 잠자는 토끼를 앞지를 날이 올 것이다.
물론 20대의 관점에서 토끼와 거북이는 완벽한 거짓 동화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단거리 경주에서 토끼가 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생은 아주 긴 마라톤 경주다. 그 안에는 수많은 역전과 추월이 존재한다. 남들과 비교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자장면과 짬뽕은 모두 각각의 가치를 가진다. 최고의 것, 남의 것만 부러워하지 말고
차선의 것,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는 방법을 배우자.
대구대학교, 초빙교수/ 인재개발연구소, 대표/ 커리어코치협회 부회장 정철상 제공
[정철상의 커리어관리] 사람들이 자장면과 짬뽕 앞에서 갈등하는 이유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