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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삼순이라는 학생이 찾아왔다. 평소 눈빛도 초롱초롱하고 삶에 대한 열정도 강해 보여서 인상 깊었던 여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삼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원하던 대학교에 못 가서 재수를 했다. 그런데 다음 해에도 성적이 좋지 못했다. 결국 2년제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막상 다니다 보니 2년제라는 게 싫었다.
공교롭게도 그 대학은 4년제 대학교와 나란히 붙어 있는 학교였다. 학교에 갈 때마다 4년제 대학과 2년제 대학 입구를 가르는 갈림길에서 “너는 2년제구나” 손가락질을 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 휴학을 하고 삼수를 준비했지만 원했던 대학교에서는 떨어졌다. 대신 지방에 있는 한 4년제 대학교에 합격했다.
그런데 원하던 4년제 대학에 들어갔는데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었다. ‘친구들은 수도권 대학에 다니는데 너 혼자 지방대’라는 눈초리를 받고 있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원했던 전공도 아니었고, 왕복 4시간이나 걸리는 통학 시간도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집안에서도 등록금만 나간다고 눈치를 주는 것 같아 다 때려치우고 간호 학원을 다닐까 고민하던 중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상담 시간이 짧아서 그녀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것을 콕 짚어주지는 못했다. 스스로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지금 수준으로는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는 상황임에도 객관적인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현실을 후회하고, 그 현실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질까만 신경 쓰고 있다는 게 그녀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었다. 정작 돌아봐야 할 건 본인 자신인데, 불만족스러운 외부 상황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문제는 나삼순 양처럼 자기 인생, 특히 현재를 불만족스럽게 여기고 과거만 후회하다가 세월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개그콘서트」라는 TV 프로그램에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이 코너는 술에 취해 사고치고 경찰서로 들어온 두 남녀의 술주정을 통해 세태를 풍자한 개그다. 특히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냐,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대사 덕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루는 취객이 경찰관에게 “김태희 씨가 어느 대학 졸업했는지 아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경찰관은 “당연히 알죠. 우리나라 최고의 1등 대학교, 서울대학교 아닙니까?”라고 답한다.
취객은 “그럼 59등하는 대학은 어딘지 알아요?”라고 묻는다. 경찰관이 그걸 어떻게 아냐고 황당해하자, 그는 “1등 대학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학벌주의와 서열주의를 없애려면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교 이름을 ‘서울대학교’로 바꿔야 한다고 외친다. 이 부분에서 관객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학벌 핸디캡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존재한다. 대학 못 간 사람은 대학 간 사람을 부러워하고, 2년제 다니는 학생들은 4년제 다니는 학생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지방대 학생들은 수도권 대학 학생들을 부러워하고, 수도권 대학 학생들은 명문대 학생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명문대 학생들은 인기학과에 열등감을 가지고, 인기학과 학생들은 해외 명문대를 못 갔음을 한탄한다. 이게 바로 대학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사회적 풍토다.
그뿐인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회사도 1류 회사와 2류 회사, 3류 회사로 나눠진다. 심지어 결혼하는 배우자감도 1등과 2등, 꼴등으로 나눠진다. 모두가 1등 핸디캡에 사로잡혀 미쳐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사실 하나가 있다. 아무리 발버둥 치며 꼭대기에 올라간들 거기에도 결국은 더 높은 자리에 버티고 선 존재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꼭대기에 올라가지 못해 자괴감을 느끼며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보란 듯이 성공한 인물들의 자살 사건들도 일부는 이런 ‘꼭대기 집착’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1등이 아니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은 빈둥거리며 경쟁을 피하자는 뜻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취 만능주의, 결과 만능주의 풍토에 의심을 품어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 결국은 내가 하고 있는 이 일도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풍토를 고민하고 성과주의의 장막에 숨겨진 인간의 잠재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필자는 스스로를 국내 최고의 ‘커리어코치’이자 ‘인재개발 전문가’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대구대학교, 초빙교수/ 인재개발연구소, 대표/ 커리어코치협회 부회장 정철상 제공
[정철상의 커리어관리]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