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지 대표이사와 이진오 강사의 미래영재 스토리] 코페르니쿠스와 아인슈타인
기사입력 2019.07.24 11:31
  • 현재까지 과학사에 족적을 남긴 위대한 과학자 중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대상을 꼽으라고 할 때, 필자는 주저함 없이 코페르니쿠스(1473~1543)와 아인슈타인(1879~1955)을 이야기하곤 한다. 영재성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역사를 뒤바꾸는 업적을 남긴 모든 과학자의 업적 하나하나가 나름의 의미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위의 두 사람에게서는 단순하게 과학적인 업적을 떠나서 진정한 창의적인 영재가 보여주는 사고와 발상의 전환이 읽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는 모두가 우주의 중심이 지구에 있다고 모두가 믿고 있을 때,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닐 수 있다는 기존의 권위와 상식을 뛰어 넘는 혁명적인 발상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혁명적 발상이 밑거름이 되면서 뉴턴까지의 후대 과학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초석이 되어 뉴턴에 이르러 고전역학의 완성이 이루어지고, 오늘날 우리가 세계를 조금 더 이성적으로 해석할 수 있기까지 이른다.

    신이 창조한 세계는 지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조화롭게 운동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이었고, 넘어설 수 없는 권위였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다.’라는 명제는 넘어서거나 거부할 수 없는 정답이었다. 누가 보아도 그렇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무거운 물체들은 우주의 중심인 지구를 향하여 힘을 받아 떨어지는 것이 틀림없었고, 태양도 달도,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천구 위에 위치하여선 규칙적으로 지구 주위를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존재하는 정답만을 신봉하고 찾으려고 했다면, 다른 길을 생각조차 할 수도, 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식과 권위를 의심하고 있는 코페르니쿠스의 이야기를 코페르니쿠스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보자.

    “왜 태양이 돌고 있는 운동을 지구가 돌고 있다고 규정하려 하는가? 배가 잔잔한 물 위를 항해할 때를 상상해 보자. 배를 타고 있는 선원에게 배 위에 있는 모든 것은 고정되어 보이고, 배 바깥의 모든 것들이 뒤로 가는 것으로 보인다. 똑같은 일이 움직이는 지구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가 아니라 전체 우주가 돌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을 얻기는 쉬운 일이다. 그렇다면 정지하거나 앞으로 혹은 뒤로 약간씩 움직일 뿐인 공기 중의 구름과 그 밖의 것들의 운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땅과 연결되어 있는 호수, 바다뿐만 아니라 지구와 연결된 공기의 일정 부분까지 지구와 함께 움직인다고 하면 모든 설명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지표에 근접한 공기와 공기 속을 떠다니는 모든 것들이 바람이나 외부에서 주어지는 다른 힘에 의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추진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잔잔하게 보이게 된다.” (코페르니쿠스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 中에서)

    코페르니쿠스의 변혁이라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사고 뒤집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아주 작은 의문을 제기할 뿐이다. 천체의 운동을 비롯한 모든 운동을 지구 입장에서, 지구를 중심으로만 봐야 하는 것일까? 지구가 중심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무한한 우주에서는 어디나 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코페르니쿠스의 질문은 별로 크게 상상하기 어려운 질문도 아니지만, 거꾸로 감히 혹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대한 회의이기 때문에 지극히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의문이기도 했다. 코페르니쿠스가 행한 상식이자 불변의 진리에 대한 신봉에 대한 소박한 뒤집기는 격렬하고 창의적인 스스로에 대한 질문과 탐구 속에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상식을 뒤집는 작고 사소한 창의적 발상과 의문에 의해 인류사의 획을 긋게 되는 근대 과학의 위대한 혁명과 지각변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20세기 현대 물리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던 아인슈타인으로 관심을 돌려보자. ‘빛’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20대 청년 아인슈타인은 빛이 입자라는 정말 상식 밖의 이론을 내어놓는다.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겨 준 ‘광전효과’에 대한 1905년 논문의 내용이 이것이다.

    청소년기 군국주의적인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던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 아인슈타인은 별로 탄탄대로의 인생경로를 겪지는 못했다. 당시 독일지역에서 유대인으로서, 기존의 권위와 질서와 상식을 쉽게 용납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않기까지 한 청년 아인슈타인에게 당시 독일 사회는 상당히 인색했던 듯하다. 신경쇠약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으로 스위스 취리히 공과대학에 낙방한 후, 교수의 배려로 겨우 진학할 수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졸업 후에도 적절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스위스 특허청의 말단 심사관으로 가까스로 일자리를 잡게 된다. 20대 후반의 특허청 말단 직원, 아인슈타인은 이후 20세기 물리학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되는 획기적 업적이 담긴 논문 3편을 1905년 연달아 발표한다. 이 중 하나가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가져다주었던 바로 ‘광전효과’에 대한 논문이다.

    19세기 이후의 여러 과학적인 연구의 성과가 빛은 파동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소리는 공기의 진동이 전달되는 것이고, 빛은 에테르라는 우주를 채우고 있는 가상 물질의 진동이 전달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이것이 역시 당시의 과학적인 상식이었다. 소리가 파동으로 보여주는 모든 성질이 빛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었다. 빛을 전파하는 우주 전체를 채우고 있는 에테르라는 가상의 물질은 질량도 냄새도 전기적 성질도 띠지 않는다고 과학자들은 믿고 있었다. 이런 상식과 권위에 의심을 품은 청년 아인슈타인은 용감하게도 에테르라는 가상의 물질은 발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빛은 에테르의 진동으로 이루어진 파동이 아니라, 빛 그 자체가 알갱이인 입자라고 하는 당시로써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황당한 이론을 펼쳐 낸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상식이라고 받아들이는 명제를 파괴하고, 새로운 상식을 구축하는 창의적인 새로운 사고와 이론으로 새로운 과학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힌다. 20세기 현대물리학이 여기서 탄생한다.

    코페르니쿠스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 이야기를 그저 먼 나라 남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여야 할까? 세계 15위의 경제 대국, 국민소득 3만 불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코페르니쿠스와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를 과연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 역사적인 사실로만 이해하여야 할까? 아니, 이젠 대한민국의 코페르니쿠스, 아인슈타인을 기대하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코페르니쿠스와 아인슈타인의 성과와 업적은, 모두가 ‘예’라고 하면서,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하고 한 번 의심해 보고, 모두가 이것이 정답이라고 이야기할 때, 변하지 않는 정답, 보편적인 정답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의 답을 구하기 위한 끊임없는 새로운 사고와 탐구 노력들을 기울였기에 가능한 업적들이 아니었을까? 상식을 벗어난다는 것이 때론 위험하고 많은 뜻하지 않는 난관들을 불러옴을 알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긍지를 가지고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음이 이들이 보여주는 위대함의 본질이 아니었을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자라고 있는, 수많은 가능성과 재능을 지닌 우리 젊은 영재들에서도 당연함과 상식을 파괴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하다고 우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다양한 재능을 가진 우수한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앞길을 적극적으로 헤쳐 나가는 것을 넘어서 인류사를 이끌고 갈 리더로서 성공할 수 있기 위해서, 머지않은 미래, 대한민국에서의 코페르니쿠스와 아인슈타인의 탄생을 위해서 지금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받고 자라게 해야 하는지?
  • ※에듀포스트에 실린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