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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부 해안 지역을 따라 여행을 해 보면, 미국 건국 초기부터 발달한 도시들이 남북으로 펼쳐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뉴욕과 워싱턴 사이에 역사적인 미국의 독립선언이 유적지, 필라델피아라는 도시가 있다. 이 도시에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플랭클린이 설립한 펜실베니아 대학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대학은 미국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중의 하나이며, 미국에서 대학 순위 10위 안에 항상 오르내리는 명문대학이기도 하다. 필자는 대학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 길에 올라서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이수하였고, 당시 교육선진국인 미국 교육 시스템 안의 경험은 영재 교육이라는 이슈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던져 주곤 했다.
전공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대부분의 박사과정은 두 단계로 구성된다. 입학 후에는 연구활동을 위한 준비단계로 대학원과정의 교과학습을 강의를 통해 받게 되고, 학부과정과 마찬가지고 시험을 통해 평가를 받는다. 물리학 전공자들은 크게 양자역학, 전자기학, 고전역학, 통계역학이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주요과목이고, 이를 수강하고 입학 후 2년 이내에, 수강한 과목의 성적과 관계없이, 이들 주요과목에 대해서 논문자격시험이라는 것을 통과해야 한다. 실제로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 박사과정을 중도 하차하게 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논문자격시험을 통과한 후에는 직접적인 연구 주제를 찾아서 연구에 몰입하게 되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주제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승인을 받게 되면 학위를 얻고 졸업을 한다.
대부분의 한국 출신 유학생들은 1년 안에 논문자격시험을 신청해서 합격을 한다. 그것도 손꼽는 등수 안에 드는 성적으로 우수상까지 휩쓸면서 시험을 통과했다. 논문자격시험에서 탈락해서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들이 수도 약 1/4 정도가 될 정도로 이 시험이 결코 쉽지 많은 않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물리학과 건물 2층 사무실 옆에는 논문자격시험에서 1등 상을 받은 학생의 명단이 연도별로 게시되어 있다. 필자의 기억으론 그 중 반 정도가 중국계나 한국계 학생들의 이름이었다. 아마 미국의 각 우수한 명문대학 모두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한다. A학점을 휩쓸고, 논문자격시험에서 우수상을 휩쓸고 있는 동양계들, 그리고 한국 출신의 학생들! 필자가 펜실베니아 대학을 다니던 20년 전 부터 지금까지 아니 그 이전부터 대한민국 출신의 유학생들이 자연과학계에서 이렇게 자신의 우수성을 단체적으로 입증했던 셈이다.
논문자격시험을 통과한 박사과정 학생들은 교수들의 연구분야를 선택해서는 지도교수 연구실로 배정을 받고는 자신의 논문을 위한 연구를 시작한다. 교과과정에서의 중간, 기말시험, 그 이후의 논문자격시험 모두는 고전물리학 탄생 이후의 연구성과들을 집적한 기초 위에서 이미 답이 존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연습과정이었다고 본다면, 연구과정에 들어가서 부여 받은 논문 연구의 주제는 아직도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내 스스로 해결의 길을 처음부터 찾아야 하는, 미지의 세계를 스스로 주체적으로 방법까지도 찾아가야 하는 과정이다. 한국계 유학생들 대부분은 공통적으로 이 지점에서 대부분 막다른 벽을 느낀다. 어리석게도 존재하는 답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기도 하고, 존재하는 답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잘못된 방법으로 낭비하기도 한다. 주제를 부여해 준 지도교수가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교수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교수가 알고 있는 답을 찾아내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고 오해하면서 역시 소중한 시간을 효율 없이 보내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양계 미국유학생들의 30여년전 일반적 모습이 아니었나 한다.
그에 비해 미국 학생들은 우리가 보기엔 어리석게도 문제에 그저 대책 없어 보이게 마구 돌진한다. 스스로 자료들을 여기저기 막무가내로 뒤져가면서 이런 저런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가설들을 세우고 고민하고 말도 안 되는 무모한 시도들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가설과 무모한 시도의 결과물을 가지고, 지도교수를 찾아가선 우리 보기에 궤변을 늘어놓는다. 우린 그것이 무모한 시도이고 궤변임을 알고 있기에, 그리고 정답으로 가기 위한 효율적인 방안이 아니기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뿐이다. 미국 학생들은 정말 자유롭게 상상하고 문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그 결과로 교수와 토론한다. 교수들 역시 학생에게 주어진 연구과제의 답을 알고 있진 못했다. 단지 해결이 안 되는 문제의 핵심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궤변 같은 가설과 교수와의 어리석어 보이는 토론 속에서 그들은 문제의 성격을 점점 더 파악하고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 간다. 그들은 정답이 아니라 문제의 파악에 주력한다. 하지만 우린 답에 급급하다.
약 5-6년의 기나긴 박사과정이 끝나고 우여곡절 끝에 논문을 쓰고 졸업할 때, 졸업식장에서 우수논문으로 수상을 하는 학생들은 더 이상 동양계 학생들이 아니었다. 교과과정 학습을 하면서, 논문자격시험을 볼 때, 우리가 약간은 우습게 여겼던 미국 출신들의 학생들이 연구결과물에선 더 창의적이고 자연 세계의 이해에 한 걸음 성큼 앞서갈 새로운 성과들을 얻어낸다. 초등학교 과정부터 스스로 자료들을 찾아가며 자료가 주는 객관적인 사실에 기초하면서 창의적인 사고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프로젝트 수업, 과제에 익숙해있던 교육적 풍토 자체가 기본부터 출발부터 달랐던 것이다. 정답이 조금만 벗어나도 인정해 주지 않고, 다양하고 풍부한 서술보다는 여러 문항 중에서 한가지 답만을 찾아내어 확보하는 성적만능의 규격화되고 관료화된 교육으로는 쉽게 적응하고 쉽게 따라갈 수 없는 간극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꼭 자연과학이 아니라도 노벨상이 아니어도 좋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창의적인 사고와 상상력으로 인류를 이끌어갈 인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주어진 문제의 정답이 무엇인가에 급급하기 보다는, 문제의 본질을 주체적으로 파악해서 핵심에 다양한 방법과 시도로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우선 필요하다. 문제를 정확하게 알아야 답을 찾는 길도 열어나갈 수 있다. 문제의 본질과 핵심을 이해함이 우선이며, 이와 같이 문제에 다가가기 위해선 스스로 자신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자기주도적으로 여러 다양한 시도들을 해 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21세기에 자신의 영재성을 자기주도적이면서 창의적으로 꽃피우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교육 시스템과 부모들의 마인드는 적절하게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정답이 하나일 수 밖에 없는 획일적인 시스템을 영재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시대착오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는 과연 없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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