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의정의 진로∙진학 컨설팅] 검사로 예측하는 나의 운명?
조선에듀
기사입력 2017.04.19 09:31
  • 오늘날 사람들은 성적은 물론 적성과 성격, 성향 등등 참 많은 것들을 검사한다. 검사 도구도 그만큼 다양하다. 질문지 형식은 물론 그림을 활용하기도 하고, 놀랍게도 지문을 이용하기도 한다. 자신의 적성과 진로에 대해서 지문만 찍어도 척하고 알 수 있는 검사가 있다는 것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실제 지문적성검사를 받으러 가는 분들을 두 눈으로 보고 나니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지문만 찍으면 지문의 패턴과 뇌의 발달 관계를 분석해, 문∙이과 성향도 파악하고 아이에게 적합한 공부 방법은 물론 직업까지도 얼추 알 수 있다고 하니 이게 대체 무슨 과학인지 마법인지 놀랍기도 했다.

    그러나 검사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예측한다고 해도 과연 그게 맞을까? 아니 옳은 것일까? 이러한 예측이 정확하지도 않을뿐더러 나아가 예측을 실시하는 이유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대체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이런 검사들을 하는가? 그 목적성이 훨씬 중요하다.

    이전에 만났던 한 학생의 사례에서 검사의 부작용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이 친구는 꿈도 욕심도 많았던 학생이었는데, 검사 결과가 썩 좋지 않았나 보다. 공부를 잘 하고 싶고, 좋은 대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검사에서 그 방향으로 긍정적인 답이 나오지 않자 그 후 아이는 무기력감에 빠져 ‘어차피 나는 안 되는데 뭐’라는 마인드로 공부를 놓았단다. 안타까운 마음에 아이의 어머니는 자신이 검사를 통해 미리 아이를 정의 내리려 한 것이 잘못은 아니었는지 후회했다고 말했다. 미리 어떤 결론을 보여주었을 때, 그게 과연 동력으로 작용할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장애로 작용할 것인가? 우리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다.

    사람은 평면적이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순하디 순하다가도 또 어떤 면에서는 날카로운 성미를 품고 있기도 하다. 여러 범주로 구별한다고 했을 때 그 중 하나의 범주에만 포함된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만약 특정 범주에 든다고 할지라도 거의 그 범주의 경계에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이과와 문과의 경계라고 하던데요?’라는 흔한 물음처럼 말이다. 사람에게 딱 떨어지는 정답이 있다면 이런 검사들이 참으로 많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여전히 아이를 키우는 방식에서부터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른 것이지 않겠나.

    오늘날 과학의 힘과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에서는 그것보다 조금 성기고 어설프더라도 인간 대 인간의 감정 교류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래사회에 더 필요한 것은 수치화된 정확한 ‘측정’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지금은 옳더라도 언젠가 그것이 옳지 않을 것일 수 있다는 것이 인간 지성의 한계지 않나. 마치 19세기 후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했던 우생학(優生學, eugenics)이라는 학문과 같이 말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학문이라 여겨지며 모든 차별을 인정하게 했던 참으로 무도한 주장이라 부르는 것이 맞을 성 싶다. 과학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생기던 시기, 사람들은 우수한 유전자와 열등한 유전자를 구분하며 우수한 유전자와 그렇지 않은 유전자를 차별해야 한다던 그것 말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져 아픈 역사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과학에 대한 맹신이 가져온 또 하나의 불운이었다.

    백 보 양보해서 측정을 한다 하자. 미리 조사해보고 대비하거나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미리 생각해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어디까지나 생각해보는 단계에 머물기 바란다.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현재의 우리 아이들은 아직도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측정’과 ‘처방’보다 ‘이해’와 ‘격려’가 더 효과적일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래왔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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