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수 경찰관의 요즘 자녀學]아이들이 ‘혐오’를 배우고 있습니다
기사입력 2021.01.29 10:22
  • 한 대학생이 7급 공무원 채용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7급 시험은 경쟁률이나 시험 과목 면에서 9급 시험보다 합격하기 더 어렵다고 하죠. 더구나 시험 준비 기간도 최소 몇 년 더 걸린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만큼 이 학생이 얼마나 고생하며 시험을 준비했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어쨌든 대학생 신분으로 7급 시험에 합격했다는 건, 학생에게는 내세울 만한 든든한 직장일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이만한 효도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합격의 기쁨도 잠시 학생은 뜻하지 않은 이유로 ‘합격이 취소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알고 보니, 이 학생은 반사회적인 게시물들로 유명한 특정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패륜적인 성희롱과 약자 혐오를 일삼던 이용자로 밝혀졌고, 합격하자마자 합격 안내 문구를 캡처해서 “일*가 있어 오늘 이 자리가 있었습니다”라는 인증샷까지 올렸다고 하더군요. 한 익명의 제보자가 ‘국민청원 게시판’에 “약칭 ‘일*’ 사이트에서 성희롱 글과 장애인 비하 글 등을 수없이 올린 사람의 7급 공무원 임용을 막아달라”라는 글을 올리며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올랐습니다.

    청원 내용에는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사람의 행동으로는 보기 힘든 내용이 많았습니다.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했다’라는 글과 함께 여성의 속옷 사진을 올렸는가 하면, 다른 사람의 사진을 무단 배포하며 ‘귀여운 여고딩들 보고 가라, 성관계를 하고 싶다’와 같은 지극히 불편한 성희롱과 여성 혐오적 발언을 여러 차례 일삼았다고 합니다. 또 길을 지나던 장애인과 노인을 무단 촬영한 사진을 올리며 조롱까지 했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결국, 빠르면 올해 초부터 현업에 배치될 예정이었던 학생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뒤늦게 자신이 올린 게시물은 모두 거짓으로 꾸민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믿어주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더구나 학생은 이 사실을 알게 될 부모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인공지능 챗봇(채팅 로봇) ‘이루다’가 출시된 지 3주 만에 서비스를 중단했죠. ‘이루다’는 일종의 인공지능 채팅 로봇입니다. ‘이루다’는 대화 능력 지표가 78%를 기록할 정도로 사람의 대화 능력과 거의 흡사하다고 해서 출시 전부터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지난해 저도 혹시 대화가 필요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해서 소셜미디어에서 ‘이루다’와 친구를 맺기도 했습니다. 나이는 스무 살, 요즘 아이들처럼 블랙핑크를 좋아하는 평범한 여성의 캐릭터를 보여줬지만, ‘이루다’는 출시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성희롱을 옹호하고, 사회적 약자를 비하하는 모습을 보여 퇴출당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이루다’와 대화를 나눈 40만 명 중 85%가 10대 아이들로 밝혀지면서 요즘 아이들의 ‘혐오 표현’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진즉에 저는 요즘 아이들의 거친 표현을 두고 “우리 사회가 아이들의 ‘말’을 붙잡았어야 했다”라는 소회를 밝힌 적이 있습니다. 말은 아이의 생각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아이의 행동마저 지배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거듭 강조한 적이 있지요. 아이들의 ‘말’이 고약스럽게 변한 건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말을 손수 제작했다고 보기도 힘들죠. 아이들이 인터넷이라는 환경과 스마트폰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일상에서 디지털 공간을 장벽 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다 보니 우연히 특정 사이트를 발견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따라 하며, 자기들끼리 전파하고 다시 그들의 문화로 만들었을 뿐이죠. 하지만 삐딱하게 만든 어른들의 언어는 아이들에게 ‘언어유희’라는 재미를 안겨줬고, 욕설인 듯 욕설 아닌 욕설 같은 효과를 주면서 이후 아이들 세대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언어가 바로 ‘야민정음’과 ‘급식체’입니다.

    ‘야민정음’은 2014년 무렵 20대 젊은 층이 즐겨 찾는 특정 편향 사이트에서 시작된 글자입니다. 글자의 자음과 모음의 배치를 마음대로 해석해서 독특한 표현을 만든 글자죠. 대표적인 게 ‘멍멍이’를 뜻하는 ‘댕댕이’입니다. ‘멍’ 자를 ‘댕’자로 해석한 것이죠. 또, ‘급식체’도 2016년 무렵 특정 사이트에서 유행하며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처음에는 2, 30대 젊은 층이 게임을 하면서 게임에 참여한 10대 아이들의 매너없는 행동을 가리켜 ‘급식충’이라 불렀고, 이후 10대 아이들의 개념 없는 언어 표현을 흉내 내며, 상대를 비하하거나 혐오하는 행동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곤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어미에 ‘~충’을 붙이거나, ‘응, 아니야’, ‘앙 기모띠’ 등이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야민정음’과 ‘급식체’의 차이입니다. ‘야민정음’이 인기를 누렸던 건, 글자의 재미였습니다. 즉, 글자 자체를 즐겼던 거죠. 하지만 ‘급식체’는 사람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급식체’가 아이들에게 상대를 혐오하거나 비하하는 데 최적화된 글자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급식체’를 쓴다고 해서 모든 아이가 혐오를 즐기는 건 아닙니다. 단순히 세대 문화를 건전하게 즐기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세간에 이슈가 되었던 혐오 표현들에서 ‘급식체’가 눈에 띈다는 사실은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특히, n번 방에서 가해자들이 나눴던 대화 혹은 피해자에게 협박과 성 착취를 할 때 사용했던 대화에도 ‘급식체’가 있었다는 점을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몇 년 전, 또래 아이들이 왜 특정 편향 사이트를 찾는지 한 고등학생이 그 이유를 연구하고 보고한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논문에서 눈에 띈 대목은 아이들이 특정 편향 사이트를 찾는 건 ‘자극적인 콘텐츠’가 많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정치와 사회현상에 대한 해석을 배울 수 있어서 찾는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특정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아이들은 자신이 정치와 사회를 배운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아이들이나 선생님, 부모님보다 월등하다고 느꼈습니다. 아이들에게 논증은 중요하지 않지요.

    초창기 특정 편향 사이트가 등장할 무렵, 사이트마다 앞다퉈 극단적인 혐오 표현물 따위의 게시물들이 쏟아져 나와 우리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문제는 우리 아이들이죠. 지금, 아이들에게 특정 편향 사이트는 재미있는 ‘유머’와 ‘짤’을 구하는 공간이 아니라 아이들의 언어와 정서, 가치관을 통째로 뒤흔들 수 있는 ‘조작 가능한 공간’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아이가 특정 편향 사이트를 출입하는지를 알려면 최근 쟁점이 되는 사건들을 가지고 아이의 생각을 물어보면 됩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이제는 정치와 사회 문제에 대해 가족끼리 토의하고 부모가 나서서 올바른 해석을 도와주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부모는 아이의 생각을 쉽게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또 아이들은 잘 숨기기도 하죠. 아이가 말하지 않으면 부모는 아이의 보이는 모습만 믿게 되지요. 부모는 과거 또는 현재의 혐오나 비하 같은 표현이 아이의 소중한 한때를 앗아갈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얼마 전에는 유명 인터넷 강사가 다른 강사를 비난하는 댓글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아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한 어른의 잘못된 행동으로 애꿎은 아이들만 피해를 본 셈이죠. 학원과 부모는 아이들의 공부를 걱정하고 있지만, 정작 저는 아이들이 그 강사로부터 배웠을 또 다른 공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탁드리건대, 오늘부터 아이의 말에 귀 기울여 주세요. 아이의 ‘말’을 고쳐주면 아이의 ‘생각’도 고칠 수 있습니다.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바꾸는 좋은 방법은 부모가 아이의 말을 붙잡고 다듬는 데서 시작한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