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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에서 관사 생활을 하다 보니, 일주일에 한 번은 손수 빨랫감을 들고 인근 ‘24시 빨래방’을 찾습니다. 베란다에 있는 구닥다리 세탁기가 제구실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빨래’라는 게 무작정 세탁기에 옷을 쑤셔 넣고 세제만 붓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우리가 입는 ‘옷감’이라는 게 마치 아이들처럼 성질이 다양하고 고약해서 자칫 함부로 섞어 같이 빨았다간 아내에게 느닷없이 등짝 스매싱을 당하기 십상이죠. 어쩌면 저의 안전과 부부 화목을 위해 ‘빨래방’은 나름 최선의 선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4시 빨래방’을 찾는 이유에는 다른 이유가 더 있습니다. 요즘처럼 날씨가 추워지면 집을 나온 아이들이 갈 곳이 없어 24시간 온기를 제공하는 ‘빨래방’으로 모여들기 때문이죠. 그래서 빨래방 사장님들은 새벽 시간에도 CC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수시로 가게를 들락거려야 하는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빨래방을 어지럽히고 엉망으로 만드는 건 아닙니다. 아이들이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건, 어쩌면 어른들의 굳어진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추위 때문에 빨래방을 원할 뿐, 가게 영업을 방해하거나 시설물을 망가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한 달 전, 저는 빨래방에서 우연히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 두 명을 만났습니다. 아이들은 추위가 매서운 시각에 빨래방에 들어와서는 제 등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아 태연하게 스마트폰을 하더군요. 얼핏 봐도 한두 번 빨래방을 출입해 본 솜씨가 아닌 듯 보였습니다. 특히, 둘 중 한 아이는 오른발을 깁스해서 발가락 다섯 개가 전부 드러나 있었습니다. 저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이에게 “다리는 왜 다쳤어?”라고 물었더니, 아이는 퉁명하게 친구랑 놀다 발을 접질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밥은 먹었어?”라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순간 대답은 하지 않고 제 얼굴만 멀뚱히 보고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이렇게 물어보는 어른이 제가 처음인 듯 보였습니다. 그길로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인근 식당을 찾아 ‘순대국밥’을 사주었습니다. 믿기 힘들겠지만, ‘순대국밥’은 아이들이 정한 메뉴이지 제가 정한 건 아닙니다. 또, 그 와중에 깁스한 아이는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사장님에게 양념장과 양파를 듬뿍 달라는 말까지 곁들더군요.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 입에서 ‘양념장’과 ‘양파’라는 단어가 서슴없이 나온다는 건 분명 슬픈 일인데도 저는 당시 헛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렇게 국밥을 사주고 아이들과 헤어졌는데, 오늘 다시 깁스한 아이가 연락을 해왔습니다. 아이는 제게 친구랑 하루 종일 한 끼도 못 먹었다면서 예의 없이 다짜고짜 “밥 사주세요”라는 말 대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생각나서 연락드렸어요”라고 했습니다. 나쁜 짓보다는 이렇게라도 연락하는 용기를 내주는 게 너무 고맙죠. 하지만 다른 때라면 당장이라도 달려갔을 법도 한데 코로나 상황이 좋지 않아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아이들이 끼니라도 때울 수 있는 편의점 ‘기프티콘’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이들은 손수 사발면과 삼각김밥 그리고 음료수 사진을 찍어서 제게 보내주더군요. “고맙습니다”라는 인사에 저는 답글로 “잠은 집에서 자야 한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다행히 집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까지 보내주었죠. 밥을 사주지 못해 거듭 “미안하다”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그래도 감사하다고 하더군요. 그러게요. 아이들의 고맙다는 말에 저는 더 고마웠습니다.
어른들은 제게 묻습니다. 집을 나온 아이를 왜 보호시설로 보내지 않고 내버려 두냐고 말이죠. 또 강제적으로라도 부모에게 연락해서 집으로 인계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지는 분도 있습니다.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보자면 상식적으로 타당한 말씀인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이들이 집을 나올 때는 저마다 안 좋은 사연을 가지고 집을 나선다는 겁니다. 일시적이거나 장기적이거나 이유는 ‘가정의 문제’라는 동일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아이가 집 주소와 부모 연락처를 말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건 생각보다 없습니다. 아무리 경찰이라도 법의 효력 없이 강제력을 행사할 수는 없지요. 오히려 아이들에게 집 주소와 부모 연락처를 받아내는 것에 집착했다가는 자칫 아이와 더 이상 연락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쉼터’ 같은 보호시설도 부모의 동의를 전제로 아이를 보호하기 때문에 아이가 부모의 동의를 거부하면 결국, ‘쉼터’ 또한 아이를 입소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아이가 ‘거리 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최근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전국 초·중·고등학생 숫자는 545만 명입니다. 그중 최근 1년 내 가출을 경험한 아이들 비율은 3.5%를 기록했습니다. 이를 환산하면, 무려 190,855명의 아이가 가출을 경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20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사회 안전망의 사각지대에서 ‘거리 청소년’으로 살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특히, 집을 뛰쳐나온 아이 중에는 공통적으로 견디기 힘든 ‘가정불화’부터 ‘가정폭력’, ‘아동학대’ 심지어 근친 ‘성폭력’을 당한 아이들도 상당수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영혼을 구타당한 채 집을 뛰쳐나오죠. 그래서 아이들은 흔히 자신의 행동을 ‘가출’이 아닌 ‘탈출’이라고도 말합니다. 아이들은 아무리 춥고 배고파도 차라리 빨래방이 집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심각해지는 코로나 상황이 집 나온 아이들을 더 고립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방역단계가 올라갈수록 아이들의 생존도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고, 결국, 아이들은 나쁜 짓을 하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배겨나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생존’만큼 상식적인 해석은 없다죠. 방역단계가 상승할수록 20대 젊은 층의 취업과 아르바이트 일자리 곡선이 곤두박질친다는 건 결국, 10대 아이들에게는 더 위협적인 상황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의 선택은 좁아질 수밖에 없고, 아이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이니 뭘 하더라도 가릴 게 없다는 ‘이기적 규범’이 확산될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아이들은 범죄에 가담해서 생존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헬퍼’ 같은 성 착취를 조건으로 동거를 요구하는 비열한 악당들의 피해자를 자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가 집을 나온다는 건, 부모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하는 ‘절차적 부담’을 예상해야 합니다. 아이의 문제가 절정에 이르면, 아이가 가진 욕구와 통제가 동시에 허물어지면서 아이 스스로 ‘집’이라는 최후의 보호장치마저 끊어버리게 되죠. 그래서 아이의 가출에 대해 부모가 ‘위기의 순간’이라고 인식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더구나 한 번 가출한 아이는 제자리로 되돌아오기가 참 어렵습니다. 또, 사소한 단기 가출을 가벼이 여겨서도 안 됩니다.
최근 들어, 아이들이 코로나 때문에 “집보다 학교가 더 좋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주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집’은 아이에게 존재만으로도 ‘회복’을 도와주는 ‘공간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집보다 학교가 더 좋다는 건 어쩌면 집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코로나 상황에 부모가 끝까지 붙잡아야 할 것은 집이 가진 ‘회복의 감수성’을 어떻게 소생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거리의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각 또한, 변화를 줘 보는 건 어떨까요? 그러니까 거리를 서성이는 아이를 위해 사회의 부모이자 어른으로서 빵 한 조각을 선뜻 내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결국, 그 용기가 우리 아이를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라는 사실도 이번 글을 통해 공감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민수 경찰관의 요즘 자녀學]‘빨래방’에서 만난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