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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한 후배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후배는 수도권에 있는 경찰서에서 교통사고 조사관으로 근무 중이고, 그의 아내 또한 제가 잘 아는 후배 경찰관입니다. 후배 내외 사이에는 초등학교 6학년인 큰딸이 있고, 밑으로 초등학교 4학년과 7살 난 두 딸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후배는 제가 부러워하는 딸부자 아빠입니다.
후배의 말투에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진지하지 않았습니다만 듣고 있는 저는 달랐습니다. 말 그대로 고민이 잔뜩 담긴 상담의 형식이 아니었고,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수런대다 말 나온 김에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
후배 : 형, 우리 큰딸 알지?필자 : 너무 잘 알지. 진짜 많이 컸겠다.후배 : 응. 근데 큰애가 공부도 잘하고, 동생들도 잘 돌보고, 다 좋은데 딱 한 가지 아쉬운 게 말이 너무 없어.필자 : 말이 없는 거야? 아니면 자기 주관이 없다는 거야?후배 : 그러네. 말이 없는 게 아니고 자기 생각을 잘 이야기를 안 해.필자 : 예를 들면?후배 : 그러니까… 와이프가 늦게 오는 날은 가끔 음식을 시켜 먹거든. 근데 애들한테 “오늘은 뭐 시켜 먹을까?” 하고 물으면 항상 큰애는 자기는 아무거나 괜찮다고 하거나 아니면 둘째가 좋아하는 거로 시켜달라고 해. 음식 말고도 뭘 하려고 물어보면 그냥 동생 해달라는 대로 해달라는 거지.필자 : 큰애는 음식 중에 뭐 좋아하는데?후배 : 없어. 뭐든지 다 좋아해. 대신 입이 짧아.필자 : 그럼 대부분 음식은 둘째가 좋아하는 거로 시키겠네.후배 : 응. 형도 둘째 잘 알잖아? 여우짓 잘하는 거.필자 : 흠. 이렇게 해. 다음에 아니 오늘 당장 가서 음식을 시킬 때 오늘만큼은 무조건 큰애가 원하는 거로 시켜줘. 무조건! 알았지? 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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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에게 ‘티’를 낼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서 저는 이 사안이 가볍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후배의 큰딸이 저는 꽤 걱정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까요.
먹성과 달곰함을 좋아하는 여느 초등학생들의 입맛을 생각하면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가 정말 먹고 싶은 게 없었을까?’ 더구나 매번 동생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싶었을지는 의문입니다. 또, 초등학교 6학년이라면 다 잘 먹을 수는 없을 겁니다. 유난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을 것이고, 없다면 그것도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후배는 저녁 끼니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당부한 대로 저녁에 음식을 시켰고, 시키면서 큰딸에게 먹고 싶은 걸 물었더니 또 예전처럼 아무거나 괜찮다며 동생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시켜달라고 했다더군요. 게다가 동생이 언니를 조르며 ‘D사 피자’를 시키자고 조르는 바람에 큰딸 역시 둘째가 원하는 것으로 시켜달라고 했답니다.
하지만 후배는 단호하게 “오늘은 무조건 큰 언니가 먹고 싶은 것으로 시킬 거야!”라고 했고, 그 순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고 했습니다. 후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큰딸이 고개를 떨군 채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뿌듯하게 입술을 꾹 깨물면서 말이죠. 그 모습을 본 후배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거렸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후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큰딸의 속마음을 보았고, 제가 왜 무조건 큰딸의 결정을 따르라고 했는지 딸의 미소를 보고서야 알았다고 했습니다.
큰딸이 걱정되었던 이유는 바로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죠. 점점 말을 잃어가는 시대를 사는 자녀 세대에게 ‘말을 하지 않는 아이만큼 위험한 아이도 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큰딸은 어찌해서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요? 흔히, 트라우마를 가진 사례가 아니라면 가장 근접한 원인은 부모가 얹어준 ‘무게’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배의 가정은 부부가 모두 맞벌이를 하고 있고, 딸만 셋인 데다 양육과정에서 부모는 큰딸에게 부모의 부재를 부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부모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겠지만 큰딸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죠. 늦은 오후 시간 아파트 단지 공원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큰 언니의 인솔하에 자녀들끼리 놀고 있는 모습은 아이들이 스스로 정한 건 아닐 겁니다.
부모가 귀가할 때까지 큰딸은 동생들을 잘 돌봐야 하는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고, 자녀의 마음이 유독 더 착하다면 큰딸로서는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아이는 부모가 내세운 일방적 ‘도리’ 때문에 점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했고, 자신은 뒷전이어도 상관없다고 내면화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책임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를 대신해 큰딸이 어린 동생을 돌봤던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부모 시대와는 결이 다른 책임감이 존재한다는 데 있습니다. 부모 시절, 워킹맘은 드물었고, 큰딸, 큰형은 엄마를 보조하는 역할과 동시에 지위에 대한 보상도 나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부부 맞벌이’라는 부모의 완전 부재로 인해 큰딸의 역할은 부모를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대리하는 수준이 되었고, 부모의 피로로 인해 보상이라는 절차적 정의는 더 기대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게다가 사는 게 힘들다고 부모가 하소연까지 늘어놓으면 아이는 점점 더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의 표현은 부모가 주는 지위에서 나타납니다. 자녀가 생각하기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방법은 부모와 교사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자녀가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부모와 교사는 알 도리가 없고, 그저 홀로 상흔을 숨기며 견뎌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사소한 친구 문제를 떠나 위험한 범죄의 덫에 걸린 상황이라면 더 아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건 어찌 보면 자녀 세대에게 가장 위험한 징후일 수밖에 없습니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다.”라는 말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냥 맏딸은 살림도 밑천도 아닌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큰딸의 어깨를 한번 바라봐주세요. 그리고 큰딸에게 “고마워”라고 따뜻하게 말 한마디 건네 보는 건 어떨까요? 아이의 말문과 몸짓을 움직이게 하는 건, 부모가 자녀에게 표현하는 고마운 마음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에듀포스트에 실린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서민수 경찰관의 요즘 자녀學] 딸의 ‘미소’를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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