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훈의 독서 컨설팅 ‘심리학이 밝혀주는 독해력의 비밀’] 독해의 심리적 과정(2)
맛있는 공부
기사입력 2015.03.03 10:08
  • 지난 주부터 추론에 관한 내용을 시작했습니다. 추론이 어떤 점에서 중요한지 쉽게 말하자면, 흔히 ‘너는 글을 생각없이 읽는다’거나 ‘나는 글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라고 할 때 바로 추론을 하는 데 실패한 경우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추론은 글에 명시적으로(표면적으로) 담겨 있지 않으나 분명히 글쓴이가 담아 둔 의미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글의 표면적인 내용이 아니지만 일단 표면적인 내용을 읽고, 그런 다음 심층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전자를 글자라는 표면적인 기호를 읽는 단계인 해독(decoding)이며, 후자는 의미를 표상하는 단계로서 추론이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능숙하게 글을 해독한다면 즉각적으로 단어의 의미를 연상할 수 있어 글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앞으로 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능숙’이라는 말을 자주 할 것입니다. 추론이 사고능력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지를 알고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실 텐데 그것만큼 ‘능숙’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점에 대해 먼저 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실제 글 읽기에서는 단어를 하나만 읽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연속된 여러 단어들을 쉴 새 없이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글을 이해하는 것이 때론 상당히 바쁘고 버겁습니다.

    다음 세 문장을 읽고 네 사람의 위치를 마음속에 그려 보세요.

    ⦁ 명수는 재석 뒤에 있다
    ⦁ 명수는 홍철의 왼쪽에 있다
    ⦁ 형돈은 홍철의 오른쪽에 있다

    하나 더 해볼까요?

    다음 글에서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일까요?

    한 사람이 사진을 가져와서 그 사진 속의 한 남자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나에게는 형제도, 자매도 없다. 이 남자의 아버지는 내 아버지의 아들이다”

    위의 세 문장은 네 명의 사람들 사이의 위치적 관계를 왼쪽, 오른쪽이라는 단순하고 친숙한 개념을 활용하여 구성합니다. 그렇지만 네 명의 관계를 마음속에 그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반면 아래 글에서는 많은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서도 아들/남자/아버지 사이의 혈연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혼동스러워 어렵습니다.

    두 글 모두 옆에 종이를 두고 적고 그리면서 읽고 생각하면 쉬워집니다. 왜냐하면 명수와 재석의 위치를 마음속에 그려놓고 주의를 명수와 홍철의 위치에 돌리는 동안 명수와 재석의 위치가 마음속에서 지워지기 때문입니다. 사진 속 인물 맞추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도 자매도 없는 내 아버지의 아들 = 나’라는 사실을 겨우 알았더라도 그것을 ‘이 남자의 아버지’에 대입시키는 것이 왠지 어렵습니다. (사람에 따라 매우 쉽거나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종이에 적으면서 하면 차근차근 따지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순간적으로 생각할 마음의 용량이 모자라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바로 읽기의 작업기억 용량(working memory 또는 읽기폭 reading span)이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만약 작업기억 용량이 더 크거나 위의 두 상황이 주어진 조건을 신속하게 단순화시킬 수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다면, 즉 작업기억 용량이 많이 필요하지 않도록 재해석할 수 있다면 a가 b의 왼쪽에 있다면 b는 a의 오른쪽에 있다는 판단을 쉽고 빠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a가 b의 아버지라면 b는 a의 아들이라는 것도 쉽고 빠르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차이는 작업기억 용량의 차이 또는 읽기 처리 과정의 능숙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즉, 추론의 능숙함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조창훈 | 서울대 인문대학원 협동과정 인지과학전공 이학석사/리딩 &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전 을지대학교 외래교수 egane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