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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피치 못할 사정으로 대학원에서 나와 충북의 시골로 내려갔을 때 나는 나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해야만 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나는 중증 우울증 상태였고, 자살충동이 끊임없이 나를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시 살기 위해 책을 통한 자기 치유에 몰두했다. 그러면서 독서치료에 대한 관심도 깊어졌다. 당시 국내의 독서치료에 관한 연구는 척박했다. 볼 수 있는 책이라곤 황의백이라는 분이 쓴《독서 요법》이라는 비전문적인 소품 정도가 유일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서구에서는 이미 무척이나 유서가 깊고 오랜 전통을 가진 분야임에도, 한국에서는 아직 그 이름조차 생소했다. 2003년에야 조셉 골드의《비블리오테라피》가 출간되며 비로소 국내에도 독서치료가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이 책 역시 영미권 저서여서 유럽에서 발달한 독서치료의 진면목까지 알기에는 부족했다.
내가 외국어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없이 해외 저서와 연구를 섭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이렇게 국내에 소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국내의 독서치료 연구는 미미하고 그 지평 또한 협소하다.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문헌정보학 분야와 심리상담 분야에서 독서치료 연구가 서로 나눠져 거의 소통조차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기이하게도 문학연구가 가운데서는 독서치료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문학이나 철학이 가장 중요한 원천인 독서치료 분야에서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거의 찾을 수 없다는 점도 아이러니일 것이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근사한 그림책이나 동화책, 문학작품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아픈 마음을 치유한다.
독서치료는 독서행위와 상담을 통해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이다.
독서치료는 인류 문화에서 실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그리스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에서 이미 잘 빚은 문학작품은 사람의 감정을 배설시키고 카타르시스(catharsis)시킨다고 설명했다. 카타르시스 요법은 감정적 고양과 이입을 통해 정신적 해방감을 얻는 치료법이다. 내 스승이자 나를 아들처럼 아꼈던 마광수 교수는 이 카타르시스 이론을 한의학에 접목해 개성적으로 발전시켰다. 나는 아주 많은 시간 그분께 문학의 치료 능력에 대해 배웠다. 문학자이면서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선생은 문학적 치유를 연구한 국내 몇 안 되는 학자기도 하다. 그의 가르침 덕분에 나는 학교를 떠난 후에도 독서치료에 대한 신념과 열의를 놓지 않았다.
또 중세유럽의 대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의사였던 라블레는 환자에게 주는 처방전에 항상 문학작품을 적어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인《가르강튀아》나 《팡타그뤼엘》등은 장장 30년에 걸쳐 써낸 것으로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와 쌍벽의 이루는 르네상스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위대한 러시아 문학비평가 바흐친은 그의 작품이 민중의 생명력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웃음을 통해 생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생의 축제를 그려내고 있다고 극찬했다. 라블레 역시 문학이 가져다주는 위안과 힐링을 실천했던 문학가였다.
우리의 전통에서도 문학이 가진 치유능력에 대한 언명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퇴계 이황은 문학이 인간의 성정(性情)을 교화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라고 여겼다. 그는 특히 우리 전통시가인 시조가 한시와는 달리 스스럼없이 노래하고, 춤출 수 있게 해주어 감발(感發, 마음이 느끼어 움직이는 것)하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조가 마음이 융통하게 해 화자와 청자가 서로 공감하는 상태로 나아가게 하고, 문학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치가 마치 도학을 공부하는 것과 같다고 상찬했다.
독서치료는 한편으로는 대단히 현대적이고 실천적인 것이다. 영국에서는 공공도서관을 중심으로 독서치료 모임이 전국적으로 활성화되어 있다. 또 영국의 병원에서도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심리문제를 겪는 이들에게 상시적으로 책을 처방한다. 영국 가디언지에 따르면 2014년부터 영국에서는 ‘책 처방’이 전국적 의료서비스로 제공되고 있다. 책 처방이란 가벼운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증상을 겪는 환자에게 약물 대신 자기구제(self-help) 도서를 처방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실제 수만 명의 환자들에게 독서치료를 처방해 큰 효과를 보았다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 영국 공중보건 당국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례에서 가벼운 우울증을 비롯한 다양한 심리문제의 경우 독서치료를 통해 완쾌되어 추가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되는 수준까지 좋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도 부산대 문헌학과에서 제공하는 파일이나 남산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증상에 해당되는 국내 발간 치유서들에 대한 목록을 얻을 수는 있지만,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며 엄밀한 임상에서의 효과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아직 나처럼 직접 독서치료를 임상에 접목하는 상담가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심리치료 효과가 큰 문학작품과 해당 심리증상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국내에 번역된 책들 가운데, 영국의 현역 독서치료사인 엘라 베르투, 수잔 엘더킨이 지은 책인《소설이 필요할 때The Novel Cure》나 독일의 책 전문가들인 마르기트 쇤베르거와 카를 하인츠 비텔이 쓴《소설, 여자의 인생에 답하다》같은 책을 참조하는 편이 아직은 신뢰할 만하다고 조언한다. 비록 이 책들에 소개된 작품들이 모두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자신이 겪는 심리문제에 해당되는 작품을 읽으며 큰 치유와 해방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짧은 지면이긴 하지만, 내가 임상을 통해 어느 정도 검증한, 우울증을 겪는 이들을 위해 활용될 수 있는 치유서 몇 권을 소개할까 한다.
내 임상에 따르면 우선 그림책 중에서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인 마이클 로젠과 퀜틴 블레이크의《내가 가장 슬플 때》는 큰 효과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올리버 제퍼스의《마음이 아플까봐》나 김희경과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가 지은《마음의 집》역시 좋은 치유 그림책이다.
우울증을 겪는 이들에게 가장 자주 권하는 문학작품은 퓰리처 수장작가이자《소피의 선택》을 쓴 소설가 윌리엄 스타이런이 자신의 중증 우울증 경험을 문학적으로 서술한 자전적 에세이《보이는 어둠》이다. 이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공감과 감정이입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엘리자베스 길버트의《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역시 여성들에게 특히 효과가 있는 치유서였다.
우울증을 본격적으로 다룬 치유서 읽기를 통해서도 치유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나는 그동안 책과 글을 통해 많은 치유서를 소개했다. 이번에는 내가 지금까지 저서나 칼럼을 통해 잘 소개하지 않았던 치유서 몇 권을 더 소개할까 한다.
티모시 윌슨의《스토리》는 약간 어렵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 가장 트렌디한 스토리텔링 치료법을 다루고 있는 교과서적인 책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글쓰기치료 방법을 잘 따르면 큰 치유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꾸뻬씨의 행복수업》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된 전직 정신과 의사 프랑수아 를로르와 《나라서 참 다행이다》라는 빼어난 자존감 치유서를 쓴 의사 크리스토프 앙드레가 공저한《내 감정 사용법》은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감정의 문제와 그로 인한 심적 갈등을 치밀하게 다룬 수준 높은 치유서이다. 이 작품은 최신 정신의학은 물론이고, 뇌과학, 진화심리학과 같은 첨단 학문들에 근거한 인간의 감정에 관한 다채롭고 치유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가벼운 스트레스나 경미한 우울증은 단지 좋은 문학작품을 읽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치유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좀 더 깊은 심리문제로 인해 고통을 겪는 분이 있다면, 우선 관록 있는 독서치료사나 심리상담가를 만나 직접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만약 그럴 사정이 못된다면 내 칼럼이나 저서, 그리고 여기 제시한 여러 책들을 이용해 치유를 간구하는 방법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가을은 우리 상식과 달리 심리문제가 증가하는 계절이다. 여름이 저물며 광량이 줄고 우울한 감정이 깊어질 수 있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우울은 가을의 마음이기도 하다. 우울감을 슬기롭게 넘어서기 위해 여러분도 이 가을, 책으로 힐링하는 일에 도전해보기 바란다.
[박민근의 힐링스토리] 독서치료, 이 가을 독서로 힐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