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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갑자기 싫어졌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어제까지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던 사람인데, 한 순간 책 한 페이지 읽는 것조차 싫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청소년들의 학업 상담을 하다보면 이는 가장 빈번한 사례이다. 공부라는 것이 꾸준히 하다보면 습관이 되고, 애착도 생겨 쉬이 중단할 수 없을 것만 같은데, 어째서 그런 일이 생기는 걸까?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공부하는 인간>에서는 지금 인류가 공부에 얼마나 많은 열정을 쏟는지 목격할 수 있다. 바야흐로 21세기는 공부의 시대이다. 제작진은 인간을 공부하는 인간, 호모 아카데미쿠스(Homo Academicus)로 명명하기까지 한다. 인류에게 공부는 삶의 방편이고, 성공의 요건이며, 창조와 발상의 원천이고, 입신양명의 기초이다.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동력은 언제나 공부이다. 또 소망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자원 역시 공부인 것이다. <공부하는 인간>에서 인류가 밤낮없이 ‘공부하는’ 현실을 목격한다. 문명이 발전하고, 지식 경쟁이 치열해지고, 정보들이 넘쳐날수록 우리가 호모 아카데미쿠스로 살 수밖에 없는 당위를 실감한다. 특히 아시아인에게 공부는 더 나은 지위와 명예, 재산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절대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에 이끌려, 공부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공부하고 또 공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마저 ‘공부는 노후를 위한 최고의 준비이다(Education is the best provision for old age)’라고 하지 않았던가?
역설적이지만 여기에 돌연 어떤 사람이 공부 중단을 선언하는, 선택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원인이 있다. 다른 목적 때문에 공부하는 것은 공부를 지속하기 어렵게 하는 주 원인이다. 학습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이는 극히 위험하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공부를 한다고 더 얻을 것이 없어져버린 상황이 찾아왔을 때 공부가 먼지보다 더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왜 공부를 하는가에 대한 자기 이해와 정립이 없이 공부는 지속할 수 없는 대상이다.
공자가 말한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不亦悅乎(불역열호,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로 공부의 본질, 혹은 정도는 능히 표현될 수 있다. 공부는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며, 때때로 배우고 익히는 일상적인 일이다. 인간에게 공부는 숙명이다. 배우지 않으면 어리석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배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주나라 태공(太公)은 ‘인간이 살며 배우지 않는다면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人生不學(인생불학) 如冥冥夜行(여명명야행))’고 했다. 불학은 암흑인 것이다. 배움의 본질은 지혜를 얻어 현명해지는 것이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무엇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어서가 아니라 삶의 긴 여로에서 지혜로운 생각을 잃지 않고 현명한 실행을 거듭해나기 위해 공부는 필요하다.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공부인 것이다.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인생이며, 결국 공부는 인생이다. 산다는 것이 바로 공부에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허락하는 ‘때때로’ 배우고, 익혀야 하는 대상이 공부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공부는 어떤 것일까? 학습심리학 분야에서는 최선의 공부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세계적인 학습법 연구자인 켄 베인(Ken Bain) 교수의《최고의 공부》에서 그 핵심적 결론을 만날 수 있다. 켄 베인은 세계적인 교수법 전문가로 ‘교수를 가르치는 교수’라는 말을 듣다. 한국에서도, 이슈가 되었던 <최고의 교수>라는 다큐멘터리로 유명해졌다.
1980년대 스웨덴의 예테보리 대학에서는 3가지 종류의 학습 유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각각 ‘피상적 학습자(surface learner)’, ‘심층적 학습자(deep learner)’, ‘전략적 학습자(strategic learner)’가 그것이다. 켄 베인 교수는 이 세 가지 학습 유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연구자들이 피실험자들을 한 명씩 면담했을 때 일부 학생들은 글을 읽을 때 그 내용을 가능한 한 많이 기억하려 애썼다고 말했다. 심리학자들이 ‘피상적 학습자’라고 부르는 그들은 나중에 받을지도 모르는 질문을 예상하면서 글에 담긴 사실과 단어들을 암기하는 데 집중했다. 이후의 연구들에서 이 피상적 학습자들은 자신이 읽은 내용을 활용하기보다는 시험을 통과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여 준 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글 뒤에 숨어 있는 속뜻과 그 응용 방법을 생각하고, 논거와 결론을 구분 지으려고 했다. 한 가지 아이디어나 추론의 방향 또는 사실이 글 전체 맥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이미 배운 것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파악하려고 애썼다. 요컨대, 이들 ‘심층적 학습자’는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다섯 살짜리 아이처럼 열정적으로 과제에 임해 분석, 종합, 평가, 이론화 같은 기술들을 사용했다.
예테보리 대학교의 연구가 발표된 이후, 사회 과학자들은 학생들의 세 번째 학습 유형을 밝혀냈다. ‘전략적 학습자’는 졸업이나 전문 대학원 진학을 위해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는다. 이들은 학급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부모는 자식의 높은 성적을 자랑스러워한다. 많은 면에서 심층적인 학습자들과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적인 관심사가 서로 다르다. 그들은 교수가 원하는 바를 파악해 점수를 잘 따는 데만 집중한다.
학습자 누구나 이 세 가지 유형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당연히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학습 유형은 ‘심층적 학습자’이다. 그들은 성현이 말했던, 공부를 아무 목적 없이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 무목적성이야말로 학문의 심원한 본질이다. 반대로 피상적 학습자나 전략적 학습자는 모두 장기적인 학습 과정에서 커다란 위기에 빠질 수 있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심층적 학습자가 아닌 전략적 학습자가 되도록 끊임없이 다음 세대를 세뇌시키고 강요해왔다. 켄 베인 교수는 피상적 학습자 못지않게, 전략적 학습 유형이 가질 수 있는 위험성과 단점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략적 학습자들은 정해진 과정 외의 공부가 성적을 까먹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모험을 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으며 지적 여행을 떠나거나 호기심에 이끌려 모험과 상상력의 세계로 빠져드는 경우도 거의 없다. 진정으로 끌리는 공부를 찾기보다는 의무적으로 채워야 하는 학점을 우선시한다. 그 결과, 그들은 개념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마치 수학 문제 풀듯 정해진 절차에 따라 학습한다. 사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략적인 학습법을 취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런 식으로 학습하도록 배우고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똑같은 개념을 담고 있는 문제를 형태만 조금 바꿔도 풀지 못하는 것이다. …… 그들은 ‘판에 박힌 전문가’가 되어 절차대로 움직일 뿐, 창의적인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정상 범위에서 벗어난 문제가 생기면 거기에 맞춰 대응할 줄 모른다. 낯선 상황을 힘들어하고, 새로운 사고와 행동을 만들어 내는 개척자가 되지 못한다. 색다른 문제에 직면하면 좌절해 자기 안에 숨어 버린다. …… 그들은 학교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불안감, 심지어 우울증까지 겪기도 한다. 새로운 문제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지 않으며, 많은 배움을 얻지도 못한다.”
켄 베인 교수의 날카로운 지적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미숙한 공부의 모습을 직시하게 한다. 한국인 대부분은 공부가 근본적으로 싫은 피상적 학습자이거나 공부를 다른 일의 도구로만 여기는 전략적 학습자로 만들어진다. 전략적 학습자가 끝까지 ‘삶의 동반자’로 자신의 학습을 소중하게 여길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니 어제까지 그토록 충성을 다하던 공부에 어느 날 태연하게 ‘배신을 때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켄 베인 교수는 만약 다행스럽게도 누군가가 공부를 하면서 앎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전략적 학습자에서 심층적 학습자로 학습 유형이 변한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교수나 강사, 작가와 같은 지식노동자나 지식서비스업자들조차도 심층적 학습자의 단계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不亦悅乎(불역열호)한 공부를 만들자면 끊임없이 자신의 공부를 반성하고, 보다 깊은 지혜에 이르고자 하는 가치와 의미, 열성과 의지를 잃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한 젊은이가 설사 어린 시절 좋은 교육과 조력 덕분에 심층적 학습자로 잘 자라났다 해도 사회의 ‘암흑’에 전염되어 지식의 도구성과 효율성, 상업성에 차차 동화되고, 결국 심층적 학습의 기쁨을 잃어버리도록 만들기도 하는 사악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그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 얼마 전 우울증 상담을 했던, 예전 학구열을 결코 잃지 않았던 한 젊은이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중 후천적 난독증 환자와 암기불능자가 되고 말았다고 괴로워했다.
나는 이런 경험을 가진 젊은이들, 지식노동자들을 숱하게 만난다. 단지 알고 익히는 것이 즐겁기 그지없던 사람이 어느 순간 지식이라는 것이 다만 생계와 지위, 돈의 방편일 따름이라고 조롱하는 지경에 이르는 사례를 무수하게 지켜봐왔다.
우리 사회의 큰 잘못 가운데 하나는 학습자나 일반인들로 하여금 학문의 즐거움을 말려 죽여 더는 느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박민근의 힐링스토리] 아이의 공부가 자라는 학습심리학-심층적 학습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