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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상담했던, 기억이 많이 남는 사례가 있다. 종민이는 사실 공부보다는 엄마에게 계속 거짓말을 늘어놓는 나쁜 습관 때문에 상담을 받았다. 종민이의 엄마는 자신의 아들을 절대 믿지 못한다고 했다. ADHD 증상이 있다고 담임선생님이 상담을 권한 것도 있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있는 거짓말과 나쁜 짓을 연이어 저지른 후 당장 상담을 받으러 왔었다.
상담 받기 얼마 전 종민이 부모는 아이가 음란물에 거의 중독되다시피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종민이 부모는 맞벌이를 했다. 종민이는 학원에서 돌아온 후 몇 시간 이상 혼자 지낼 수밖에 없었다. 종민이 엄마는 그날그날 할 공부를 정해주고 집에 돌아와 확인하는 것으로 아이의 공부를 챙기고 있었다. 종민이는 친구를 통해 문제지 해답을 구해 답을 보고 숙제를 한 뒤 나머지 시간 대부분을 게임을 하거나 음란물을 보며 보냈다. 스스로 문제를 푼 흔적이 없는 점을 의심스럽게 여긴 엄마가 숙제로 내준 문제를 다시 풀라고 하자 당연히 종민이는 손도 대지 못했다. 종민이는 자습은 고사하고 학교에서 내준 숙제마저도 제 스스로 하기 힘들어할 만큼 자기조절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상담받기 얼마 전 더 큰 일이 터지고 말았다. 종민이가 엄마 주민번호를 도용해 음란물 사이트에 접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모는 종민이가 지우지 않은 음란물 사이트 주소를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를 다그치자 하루에 몇 시간 이상 음란물을 볼 때도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상담 중 종민이 엄마는 울음을 터뜨리며 어쩌다 아이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모르겠다고 한탄을 했다.
자기주도학습(self-directed learning)이라는 말과 비슷하지만 핵심개념에서 차이가 있는 자기조절학습(self-regulated learning)은 학습자가 자신의 학습을 스스로 조절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말 그대로 자기조절학습에서 관건은 학습자의 자기조절능력이다. 한국에서는 스스로 창조적인 학습 커리큘럼을 짜기보다는 주어진 학습내용을 숙달하고 숙지하는 자기조절적 학업수행이 더 중요한 까닭에 우리 실정에 적합한 용어는 어쩌면 ‘자기조절학습’일 것이다.
자기조절학습의 핵심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조절능력의 원천은 어릴 적 형성되는 만족지연능력이다. 마시멜로 실험을 알고 있을 것이다. 네 살짜리 아이 600명에게 마시멜로 한 덩이를 주고서 15분을 참으면 한 덩이를 더 주겠다고 약속했을 때 끝까지 이를 참아내는 아이는 고작 서른에 불과했다. 이 실험에 성공한 30명의 성장 과정을 관찰했더니 결과는 놀라웠다. 미 대입수능시험인 SAT에서 실험에 실패한 아이들보다 무려 210점이 높았고, 30년 이상 관찰한 결과 연봉은 물론, 개인적 성공, 직무능력 등 다방면에서 실패한 아이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어릴 적 보여주는 만족지연능력이 아이의 앞날을 점칠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이 만족지연능력이 선천적인 것이리라는 심증을 품어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유전적, 기질적 요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교육과 양육을 펼치느냐에 따라 아이의 만족지연능력, 나아가 자기조절능력과 집중력은 얼마든 신장될 수 있다는 결론이 지배적이다. 마시멜로 테스트 연구를 이끌고, 그간의 관찰을 면밀하게 분석한 월터 미셸 교수는 그녀의 책《마시멜로 테스트》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바뀔 수 있다”는 말로 이 연구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대신하고 있다. 인간은 고원한 지성을 가지고 있기에, 얼마든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미셸 교수 역시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만, 자기조절능력의 중심에는 도덕성과 긍정적 가치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 스스로를 어떤 일을 조절하는 동기는 대개 도덕적인 이유에 근거한다. 자기 신념에 따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고 이를 실천하는 도덕적 판단이 자기조절능력을 좌우하는 요인인 것이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학습과 관련된 자기조절능력이 연습과 조건화 과정을 통해 충분히 확보될 수 있다는 견해에 치중해왔다. 꾸준한 학습훈련의 중요성에 방점을 두었다. 물론 습관의 힘은 중요하다. 우리가 별다른 지루함 없이 어떤 수행을 반복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꾸준한 반복훈련의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기조절능력의 핵심은 도덕성일 수밖에 없다.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지키는 마음의 근간은 근본적으로 도덕성이 담당하기 때문이다.
내가 부모들에게 자주 설명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가운데 ‘신독(愼獨)’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대학(大學)’이나 ‘중용(中庸)’에 나오는 유교적인 용어이다. 신독은 다른 이가 보거나 듣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않는 마음가짐이다. 도덕성과 이어지는 자율성인 셈이다. 다산 정약용은 그 뜻을, 단순히 사람이 없는 곳에서 스스로의 행동과 마음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 정도가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정의롭지 못한 생각을 품지 않는 마음으로까지 확장했다. 다산은 신독의 근거를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가지고 있는 도덕률에 대한 이성적 두려움에서 찾았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함에 있어 혹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아닌가 하는 도덕적 경각심을 가지라는 뜻이다.
만약 어떤 아이의 마음에 부도덕성이 자라고 있다면,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신독할 수 없다면, 신독은커녕 타인과 부모의 고마움과 은혜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교사나 주변 어른이 그들에게 제대로 된 도덕적 가르침과 경험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많은 부모들이 공부만 중시 여기고, 아이의 이기적 욕심을 끊임없이 채워주고, 아이를 마치 왕자와 공주 취급하며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무뢰한’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내 새끼만 함함하다고 말하는 고슴도치 교육은 결국 아이의 소중한 자기조절능력을 파괴시키는 파국을 맞이한다.
아이가 공부나 자기 일에서 신독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부모의 태도나 생각부터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마음과 인격이지, 공부나 어떤 다른 일이 먼저일 수는 없다는 가치와 확신부터 재무장해야 한다. 부모가 성적이나 공부만 강조하고, 거기에만 모든 시간을 할애하다 보면, 아이들은 정작 알아야 하는 인생의 가치와 바른 마음가짐을 익힐 시간이 없어지고, 또 익히지도 못한다. 공부만 쫓다보니, 바른 마음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예의 없는 아이가 되고 마는 것이고, 결국 그토록 소중한 바른 마음을 잃고 나니 하찮은 ‘공부 따위’는 하지 않는 역설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는 부모가 스스로 판 무덤에 다름 아니다.
공부하는 마음을 지지하고 떠받치는 다양한 마음이 존재하지만, 결국 공부를 꼭 해야 한다는 책임과 소명의식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학습자는 자신의 공부를 소중하게 지킬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도, 세상도, 자신의 지식도 ‘두려워’ 할 줄 알고 아낄 줄 알아야 한다.
현실을 자각하고, 자아와 직면하는 연습, 바른 가치에 대한 사유 활동을 통해 아이들의 도덕성은 얼마든지 다시 자랄 수 있다. 일단 부모가 내 아이를 믿어야 한다. 내 아이는 본성적으로 신독할 수 있으며, 좋은 가르침이 거듭되면 고통 없이 신독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자라는 점을. 부모는 내 아이가 가진 자기조절능력,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도덕성의 씨앗을 믿어야 한다.
나는 종민이와 도덕성 발달 독서치료를 진행했다. 톨스토이의 단편 가운데《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부터 읽었다. 이후 책과 쉬운 에세이로 종민이가 세상을 공감하도록 이끌었다. 종민이는 난생 처음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종민이 부모에게도 아이의 인생설계에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알려주었다. 아이와 처음으로 도덕적 문제와 학습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부모와 아이가 진작 함께 했어야 할 일이다.
최근 자녀가 하나 둘인 가정이 늘면서 자녀가 원하는 것을 아무 대가없이 즉각적으로 제공하는 양육태도를 취하는 부모가 많다. 이는 아이가 끈기, 자기조절능력을 잃게 만드는 위험한 양육이다. 부모라면 아이에게 모든 일에는 꼭 대가가 따른다는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 뇌에는 만족을 지연시키고, 스스로를 제어하는 뇌 부위가 따로 존재한다. 전문용어지만 전두엽의 안와전두피질(OFC, Orbital Frontal Cortex)가 그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부모의 지나치게 허용적이고 과잉보호하는 양육이 아이 뇌의 이 부위가 제대로 자라는 것을 방해한다.
자라는 아이들은 조금 어려운 일을 만나 참고 견디는 일을 반복하고, 그것을 인내해야 하는 이유와 의미를 스스로 내면화함으로서 자기조절능력을 키워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일이다.
조선시대 최고 유학자 퇴계 이황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천재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책 읽기와 시 짓기를 즐기기는 했으나 타고난 문재(文才)는 아니었다. 그런 탓에 과거시험에도 세 차례나 낙방하며 크게 상심한 적도 있었다. 실의에 빠져 있던 퇴계는 동양적인 심리학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심경心經》을 다시 읽으며 자기수양에 대해 깊이 깨달았다. 퇴계는 이후 몇 년간 흐트러짐 없이 공부했고 결국 과거에도 붙었다.《심경》에서 다루는 핵심내용이 바로 스스로 제 마음을 다스리는 자기조절의 중요성이다.
흐트러짐 없이 자기를 지켜내는 능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속적인 도덕성 사유 훈련을 통해 자기원칙을 세우고, 자기조절능력이 높아진 아이는 자신의 희망과 꿈을 위해, 삶의 이유와 가치에 따라, 혹은 도덕적 이유에서 공부나 다른 일을 하며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스스로 공부를 하는 아이와 스스로 공부하지 못하는 아이의 가장 큰 차이는 신독의 마음가짐, 도덕적 자기조절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여부인 것이다.
[박민근의 힐링스토리] 아이의 공부가 자라는 학습심리학-자기조절능력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