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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지영이는 초등학생 때부터 항상 상위권 성적을 지키던 아이였다. 그런데 고등학교 들어오며 왠지 공부가 힘에 부쳤다. 과중한 학습량 때문이기도 했지만, 공부에 대한 의욕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던 점이 더 컸다. 생각했던 것만큼 준비를 못하고 치른 첫 중간고사는 아니나 다를까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생전 처음 반에서도 5등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것은 자신이 치른 시험 성적 가운데 가장 낮은 것이었다. 중간고사 결과에 큰 좌절감과 자괴감을 느꼈다. 자신의 무능함과 나태남에 대한 질책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시험에 대한 불안감도 갈수록 커졌다. 주변에서 툴툴 털고 다시 공부하면 된다는 조언을 숱하게 들었지만,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중간고사 성적 결과에 낙담하며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던 지영이는 결국 준비를 거의 못한 채 다시 기말시험을 쳤고, 성적은 반에서 10등 안에도 못 드는 참담한 결과였다. 성적표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영이는 신경쇠약(neurasthenia) 증상이 나타났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며 우울감과 불안, 자괴감에 시달렸다. 시험 걱정이 항상 많았던 지영이는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자신의 성적을 알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 탓에 심한 수치심과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인 소개로 내게 상담 받으러 왔을 때 지영이는 급성우울증(Acute Depression)에 가까운 증상을 보였다. 지영이를 데리고 온 엄마에게 아이의 마음근력이 상당히 훼손된 상태라고 전했다. 검사들 가운데는 지영이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알아보는 검사도 있었다.
지영이의 회복탄력성은 한국 청소년의 평균을 한참 밑돌았다. 가족 간의 불화나 특이한 심리적 외상이 없었던 지영이의 학습공포증은 오롯이 그간 계속된 학업스트레스에 기인한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의 상위권 성적은 지영이의 밤샘 고민과 스트레스의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회복탄력성이란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힘인 회복력과 높은 지점으로 다시 튀어 오르는 탄력성을 합친 말로, 역경을 이겨내는 심리적 근력을 말한다. 심리학자 조앤 보리센코는 회복탄력성을 좀 더 줄여,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내적 힘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이 살아가며 겪게 되는 다양한 난관과 어려움에 적응하며 좀 더 유연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스트레스 대응력이 바로 회복탄력성이다.
회복탄력성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자기조절능력, 대인능력 혹은 공감능력,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낙관성이 합쳐져 회복탄력성의 뿌리를 형성한다. 그래서 회복탄력성을 한 사람의 마음근육의 총량과 등치하기도 한다.
역경이나 스트레스 상황을 만났을 때 감정적 동요를 겪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한 채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조절하는 자기조절능력이 꼭 필요하다. 감정조절, 충동통제, 고난이 생긴 이유에 대한 분석능력이 합쳐져 자기조절능력을 형성한다.
또 회복탄력성이 높으면 대인능력 역시 높아서 주변 사람들과 잘 소통하고, 타인에 대한 정서적 대응에 있어서도 능숙하다.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이 가진, 뛰어난 대인능력은 역경을 이기기 위해 주변에서 심리적 지지를 이끌어내기 용이하게 한다. 가령 난관에 봉착했을 때, 공감적인 아이는 주변사람들, 선생님, 친구, 부모와 잘 소통하며 자신에 대한 심리적 지지나 실질적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해 정서적 고통을 덜고 그들에게서 더 많은 조언과 멘토링을 이끌어낸다.
또 회복탄력성은 지난주에 설명했던 낙관성이 바탕을 이루는 심성이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 판단과 감정을 가지게 하는 낙관성은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주어진 과제나 해결 지점을 찾아 능동적으로 대처하게 이끈다.
이런 요소들이 결합해 회복탄력성의 근간을 형성한다.
우리 안에 잠재된 회복탄력성 덕분에 우리는 질병, 이혼, 실직, 재정문제, 학대, 전쟁, 테러 같은 각종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희망과 의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긍정심리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외상 후 성장이다. 극심한 역경을 겪은 후, 상당히 많은 사람이 종종 PTSD(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수준에 달하는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증을 보인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 그들은 성장한다. 장기적으로 그들의 심리적 기능 수준은 전보다 더욱 높아진다.”
세월호 사건 후 많이 회자되었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는 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전쟁이나 성폭행, 큰 재해, 교통사고 같은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뒤 얻게 되는 심신의 질환이다. 지독한 심리적 상처 다음에 겪는 불안, 우울, 자살충동, 불면증 등의 극도의 정신적 후유증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의 편견과 다르게 연구에 따르면 이런 극단적인 상처를 경험한 뒤에도 사람들은 대개는 다시 일어나 이전의 정신적 상황을 회복한다. 우리가 가진 회복탄력성은 강할 뿐만 아니라 쉬이 꺾이지 않는 삶의 원동력이다.
심리학자 조지 베일런트가 우리 인생은 “기쁨과 비탄은 섬세하게 직조되어 있”어서 고통에는 항시 밝은 뒷면이 있으며, 우리는 적응과 성숙을 통해 어떠한 “쇳조각도 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했듯, 인간에게는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이 존재한다.
물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길 만큼 어마어마한 역경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어려움들이 도사리고 있다. 기나긴 학습경쟁에 내몰리는 우리 아이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우리 아이들 앞에는 공부와 관련된 숱한 좌절이 늘어서 있다. 성적, 등수, 친구들 간의 학습경쟁, 공부슬럼프, 진로갈등, 입시문제와 같은 수많은 삶의 고난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이런 다양한 난관을 이겨나가려면 인내력이나 끈기, 강한 정신력이 요구된다. 즉 회복탄력성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공부하며 만나는 난관을 이기는 힘을 ‘학습 회복탄력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아이들은 이런 문제를 만나도 잘 견뎌내고 자신의 공부를 굳건히 지켜내지만, 어떤 아이들은 쉬이 좌절하고 공부에 대한 열의 역시 쉽게 잃어버린다. 즉 학습 회복탄력성이 낮은 아이들은 조그만 학습적 난관이나 갈등 앞에서도 좌절하고 만다.
왜 우리 아이들의 회복탄력성이 꺾이고 소진되는 것일까? 어느 순간 공부를 놔버리고 좌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 이는 아이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구조적인 원인이 크다. 우리 아이들은 공부와 관련해 비정상적으로 많은 좌절의 경험을 겪을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시험과 평가는 피할 수 없이 아이들이 좌절감을 느끼게 만드는 구조적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시험을 치르고, 자신의 공부 성과에 대해 평가받는다.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아이들은 지속적으로 평가 당하고, 실패했다는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이렇게 구조화된, 잦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 아이들의 정신건강 역시 열악해진다. 나는 학업스트레스로 인해 심각한 심리문제를 경험하는 아이들을 많이 난만다. 가령 상담 때 등교거부나 시험불안증을 호소하는 아이들은 의외로 많다. 심지어 시험 전 공황발작에 가까운 공포를 경험하는 아이들도 심심찮게 만난다. 아마 외국에서는 흔치 않은 일일 것이다.
끊임없이 평가가 이어지고, 이런 평가의 연속에서 전보다 나은 성적을 거두거나 유지하지 못한다면 이는 곧 아이들에게 좌절감을 안길 수밖에 없다.
시험 말고도 아이들 일상에는 공부와 관련된 잦은 실패와 좌절이 도사리고 있다. 또래 사이의 경쟁이나 어른들의 학습에 관한 간섭, 과중한 과제와 같은 다양한 난관들이 아이들이 걸어가는 공부 여정에 가시밭길처럼 놓여 있다. 그리고 언제든 그것은 잘 버티던 아이를 순식간에 쓰러뜨리고 마는 것이다.
긴 학령기 동안 우리 아이들은 ‘학습’이라는, 다양한 도전과 시련이 기다리는 대상과 함께 걸어가야 한다. 따라서 학습적 난관이나 과제 앞에서 이를 이겨내는 힘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내 아이의 학습 회복탄력성을 살펴야 하는 이유이다. 학습 회복탄력성이 높은 아이는 많은 학습 난관 앞에서 굴하지 않고 자기 길을 걸어갈 것이다. 오랜 학업스트레스로 회복탄력성이 망가진 아이들은 불행히도, 어느 순간 공부와 멀어지고 공부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생각에 괴로워하며 학창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민근의 힐링스토리] 아이의 공부가 자라는 학습심리학-회복탄력성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