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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아주 비관적으로 세상을 보는구나.”
검사 전 잠깐 면담을 하며 이미 예상은 했으나 K군의 낙관성 지수 테스트 결과는 심각했다. 흔히 보기 힘든, 낮은 마이너스 점수가 나왔다. 낙관성 지수 테스트는 그 사람이 가진 생각의 패턴을 살펴 매사에 얼마나 낙관적으로 사고하는지, 혹은 비관적으로 사고하는지를 알아보는 간단한 심리검사이다.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K군은 중증 우울증을 앓는 사람만큼이나 사고가 부정적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소문난 영재였고, 중학교에서도 전교 상위권 등수를 놓치지 않았던 K군은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 공부가 버거워졌고 공부의 의미도 잃었다.
내가 느낀 K군의 가장 큰 문제는 뇌리에 새겨진 ‘실패한 자기 서사’였다. 여러 가지 이유들, 특히 부모의 억압, 불합리한 교육제도, 사악한 선생들 탓에 자신의 공부는 망가졌으며, 이제는 자신이 구제불능의 상태에 도달하고 말았다는 줄거리였다.
K군은 2년 전쯤부터 공부에 뜻이 전혀 없는 몇몇 친구와 어울리며 PC방 등을 전전했고, 불과 1년 만에 성적은 반에서조차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런 추락이 자신 역시도 놀랍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 때문에 부모와 불화도 깊어졌고, 몇 번은 집에 알리지 않고 친구 집에서 며칠 넘게 지내는, 가출 아닌 가출을 저질렀다.
현대인은 우울하다. 점점 더 우울해지고 있다. 인구의 절반은 우울감의 족쇄에 묶여 살아간다. 하지만 우울은 삶의 행보를 헝클어뜨리는 비정상의 근원이기도 하다. 우울하거나 마음근력이 약한 사람들을 비합리적 신념이 단단히 마음 안에 화석화된 특성을 가진다. 현실과 동떨어진 비관주의를 확신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거꾸로 우울하다는 것은 비관주의가 견고하게 내면화되어 연이어 마음근력 또한 허약해지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 학자들은 부정적 감정이 부정적 사고와 신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론 벡(Aaron T. Beck)과 앨버트 앨리스(Albert Ellis)는 인지행동치료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알프레트 아들러(Alfred Adler)나 앨버트 밴듀라(Albert Bandura)에게 영향을 받은 벡은 처음은 정신분석치료사였다. 그러나 우울증에 정신분석치료는 잘 듣지 않았다. 우울증 치료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우울한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인지적 오류(모순된 사태인식)가 그들의 우울증을 더 심화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울증에는 무의식을 탐구하거나 분해하는 정신분석치료보다 인지적 오류를 논리적 대화로 바로잡아주는 인지교정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울한 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사회나 세계에서 대해, 또 자신이나 세상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 편향을 가진다. 그들이 비관적인 생각들을 합당하고 낙관적인 것으로 바꾸면 우울증도 따라서 호전된다.
이를 ‘인지행동 교정’이라 부른다. 인지행동치료는 우울증 치료나 불안장애 치료에 탁월하고, 현재 가장 널리 쓰이는 치료법이기도 하다.
벡과 함께 인지행동치료를 정립한 앨버트 앨리스는 우리 사고와 감정, 행동이 형성되는 ‘ABC 모델’을 정식화했다. ABC 모형은 인간의 행동이나 감정이 만들어지는 순차적 과정을 표로 그려낸 것이다.
A는 자신이 살며 겪은 선행사건(Activating event)을 나타내고, B는 이 사건을 나름대로 해석하는 자신의 신념체계(Belief system)를 뜻하며, C는 사건에 신념이 더해져 만들어진 심리적, 행동적 결과(Consequence)를 의미한다. -
도표에서처럼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비합리적 신념이다. 이를 역기능적 사고라고 부른다. 앨리스는 심리적 문제를 일으키는 비합리적 신념(역기능적 사고)에 대해 합리적이고 정당한 반박(Dispute)을 거듭하면 정상적인 심리가 회복되는 효과(Effect)를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내면을 채운 부당한 사고는 단지 사고의 재료로만 쓰이지 않는다. 부당한 사고는 비정상적이거나 부정적인 심리나 행동까지 이끌어낸다. 잘못된 생각들이 모여 슬픔과 분노, 고통과 자책감을 배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안의 부당한 사고들을 정리하고 재구성하는 생각치유를 시도하면, 건강한 사고는 물론이고 안정된 심리나 마음근력도 되찾을 수 있다.
많은 일을 감당해야 하지만 의욕을 느낄 수 없다며 어려움을 토로하는 청소년이나 청년을 만날 때마다 나는 이 부정적 생각의 다발과 부정성의 연결고리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만약 지금 의욕이 부족하고 무기력하며, 판단과 결정에 어려움을 느낀다면, 먼저 자기 안을 채우고 있을 부정적 판단과 관점의 덩어리부터 의심해보고 색출해야 한다. 이미 그 생각의 암 덩어리가 크고 광범위하게 마음을 포획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때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바른 생각을 하는 법부터 다시 배우고 연습해 자신을 채운 부당한 생각더미들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K군에게도 자신의 비합리적 신념의 성을 깨줄 합리적 생각의 망치가 필요했다. K군은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저열하며, 인간은 이기적일 따름이며, 세상은 절망적이며 고통스러울 뿐이라는 생각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일, 부모나 어른을 위해 애를 쓰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이 즐길 수 있는 현재의 쾌락들에 최대한 집중하고 하루하루를 이기적 쾌락주의자로 사는 것이 가장 합당한 삶의 방식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것은 ‘하루살이 인생론’일 따름이다. 한 인생을 100년을 책임지며 살게 할 제대로 된 인생론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는 사회를 지탱하고 균형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며(그러니 대개 네가 안심하고 살아가는 것일 테고), 사람들의 이타성이 인류의 영속을 이끌어온 큰 힘이었으며, 때로 절망하고 좌절하지만 희망이라는 단어가 남아 오늘을 벅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설득했다.
고개를 숙이고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그 어떤 말도 자신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이라며 확신하던 K군도 차츰 변했다. 무쇠도 대장장이 앞에서는 흐무러지는 법이다. 휘어지거나 녹슨 쇠는 대장장이 손에 한 번 흐무러져야 다시 빛을 내며 단단해질 수 있다. 언제부턴가 K군의 변화가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생각이 바뀜에 따라 감정과 마음도 변했다. 드디어 웃으며 나를 반기는 날이 찾아왔다.
[박민근의 힐링스토리] 우울증과 무기력감에서 벗어나는 법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