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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상담했던 은서씨의 문제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녀의 극심한 우울증은 단순한 심리문제가 아니라 삶의 무의미와의 투쟁 결과였다. 서른 즈음, 지옥 같은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혼을 하며 아이와도 더는 만날 수 없었고 가진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던 그녀가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직 ‘죽음’이었다. 그녀는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시시때때로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그녀는 당시 정신과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고 있었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나를 찾아 심리상담을 받았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삶은 무의미하다고 여긴다.
“그래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다른 자들보다 먼저 죽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건 누구나 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 60살에 죽든 별 다를 것이 없다는 것도 말이다. 어찌 됐건 그 뒤엔 또 다른 남자들, 다른 여자들이 살아갈 것이고 계속해서 죽어갈 것이다. 세상은 전과 다름없이 지속될 것이다.”
상담에서 은서씨는 ≪이방인≫ 이야기를 자주 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소설이고, 당시 자살을 실행하는 데 힘을 보탠 작품이라고 했다. 과연 그녀의 생각이 옳을까? 생은 단지 무의미로 가득 채워진 대상일까? 단지 우리는 죽음이 두려워 억지로 살아가는 것일까?
그녀의 심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심리상담이 아닌, 철학적 치유와 근본적인 삶의 성찰이 요구되었다. 결론적으로, 철학적 견지에서 대부분의 자살은 오류에 가깝다. 자신이 끝까지 살아보지 않은, 제 인생을 예단하는 논리적 오류를 포함한다. 인생은 유한하다. 우리에게는 단 한 번 살아갈 귀한 기회가 주어져 있다. 이는 결단코 행운이다. 우리가 풀 수 없을 것이라 속단하는 난관이나 역경은 대개, 시간이 지나면 극복할 수 있는 일일 때가 많다. 결코 풀 수 없는 고난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그 상처가 아물기 마련이다. 그러니 한 번뿐인 인생을 오판하고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는 자살은 오로지 편협한 일일 따름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서 빅터 프랭클은 대부분의 심리문제가 이런 생의 의미 상실과 맞닿아있다고 말한다. 심리적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다수는 지금 이 순간의 생에 눈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프랭클은 생의 의미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살아가는 삶 속에 이미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예전 법정 스님은 병마로 당신의 생이 마감하는 때에 법회를 가졌다. 때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죽음 앞에서 선사는 이야기했다.
“꽃은 우연히 피지 않습니다. 계절이 바뀜에 따라서 그저 꽃이 피고 지는 것 같지만, 한 송이 꽃이 피기까지는 그 바탕에 인고의 세월, 참고 견디는 그런 세월이 받쳐주고 있습니다. …… 이와 같은 꽃과 잎을 바라보면서 우리들 자신은 이 봄날에 무슨 꽃을 피우고 있는지 저마다 한 번 살펴보십시오. …… 저마다 이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참고 견디면서 가꿔온 그 씨앗을 이 봄날에 활짝 펼쳐 보기 바랍니다.”
은서씨가 눈물을 왈칵 쏟았던 법정 스님의 법회 영상에서의 말씀이다. 최근 들어 나는 여러 경로를 통해 그날의 은서씨처럼 삶의 무의미에 시달리는 이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사회적 징후를 빈번히 접한다. 세상이 험악해질수록, 묻지마 범죄나 극단적인 쾌락주의, 생활감각의 상실, 중독과 이기주의와 같은 한국병 또한 깊어지는 듯싶다. 그리고 대개 그 뿌리에는 이런 생의 감각 상실이 가로놓여 있다. 그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은 아직 자신 안의 꽃과 그 씨앗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어지러운 때일수록 우리에겐 더욱 자성이 필요하다.
다시 한 번 자신의 꽃을 살펴보도록 하라, 나의 꽃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위해 피어나고 있는 것인지.
박민근독서치료연구소 소장 /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 저자
[박민근의 심리치료] 삶의 의미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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