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근의 심리치료] 생각 치유 - 어리석음에 대하여(2)
맛있는공부
기사입력 2014.05.26 11:02
  • 우리는 다시 한 번 인간의 큰 어리석음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 마음 안에 암흑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냉정한 이성의 지배 아래, 쉬이 길들여지지 않는 꿈틀거리는 뱀이나 성난 코끼리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때로 그것은 프로이드가 말한 ‘무의식, 이드(id)’ 이상의 것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조너선 헤이트는 우리 마음의 중심에 앉아 있는 막강한 코끼리와 이를 움직이는 미력한 기수의 은유로 인간을 비유한다. 따져 보면 한 사람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일을 해내는 코끼리지만, 내 주체성이자 지혜인 기수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코끼리를 잘 다스리지 않으면, 또 다른 나인 그 코끼리는 난동을 부리고 말 것이다.

    인간은 세차게 움직이는 코끼리와 이를 다스리는 기수로 이루어져 있다는 비유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어쨌든, 우리 안의 코끼리가 요동치더라도 영혼을 품은 기수가 흔들려선 안 된다.

    많은 석학들이 현대인의 삶의 외형은 커졌지만, 그 외형을 다루는 진실한 자아는 되레 축소되었다고들 진단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지만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주체의 종말’ 문제에 직면해있다. 세속의 욕망이나 타인의 열망만을 따라다니다 보니, 자신의 내면이 요청하는 진실한 의미나 가치는 망각하는 ‘어리석은 나’들이 되고 말았다.

    한동안 우리를 몹시도 슬프게 했던 일련의 사태는 ‘시스템’의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나’라는 괴물의 섬뜩한 출현이었을 것이다. 잠시 암운이 걷히자, 우리는 위선의 말로 자신의 욕망을 치장해온 많은 자들을 똑똑히 보았다.       

    코끼리의 크기와 힘에만 치중하는 삶을 살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원치 않는 아수라로 소용돌이쳐 들어간다. 지혜와 덕성을 잃을 때 삶은 방향을 상실하고 어둠으로 치닫는다. 그것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놀란 사람처럼 또한 무지한 형상을 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중, 삼중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이 진정 이 생(生)의 목표일는지 모른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욕망’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그림자가 두렵고 자기 발자국이 싫어 이것들을 떠나 달아나려 했는데, 발을 더 자주 움직일수록 발자국은 더 많아졌고, 빨리 뛰면 뛸수록 그림자는 더 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그것이 자신이 더디게 뛰는 까닭이라 여기고 쉬지 않고 뛰었고 결국 힘이 빠져 죽고 말았다. 그는 그늘 속에서 쉬면 그림자가 사라지고, 고요하게 있으면 발자국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人有畏影惡迹而去之走者. 擧足愈數, 而迹愈多. 走愈疾, 而影不離身. 自以爲尙遲, 疾走不休, 絶力而死. 不知處陰以休, 影處靜以息迹.
    - 莊子,「漁夫」

    나 역시 한때 짙은 내 안의 그림자에 포획되었던 바 있다. 15년 전쯤 나는 이 우화를 읽고, 천둥 같은 죽비소리를 들었고, 그로 인해 깊은 자성의 시간을 가졌다. 강렬하게도, 이 우화는 그때 내 처지처럼 느껴졌다. 장자의 글에 나오는 그림자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사태이자 관념이다. 그림자는 살며 우리가 흔히 현혹되는 무엇이다. 그림자는 자신의 실체라기보다는 삶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덧없는 형상일 수 있다. 그 찰나의 형상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생의 중심을 잃게 된다.

    장자의 이 우화를 읽은 이후 나는 자주 내 그림자를 쳐다보곤 한다. 나는 늘 그늘 속에 앉아 내 그림자의 실체를 들여다보려 애쓴다. 그러지 않으면 또 다시 어리석은 ‘나’에 사로잡힐 것이므로.

    인간은 결코 똑똑하지 않다. 어리석기가 쉽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행동경제학이라는 신생학문을 정착시킨 인물이다. 행동경제학은 가장 신중한 선택을 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는 인간의 숨겨진 어리석음의 예들을 자주 거론한다. 행동경제학은 대개 인간은 합리적인 판단이나 결정보다는 비합리적이고 심리적인 이유들에 의해 움직이며, 이런 비합리적 행위들의 합이 현실경제, 사회의 흐름을 형성하는 근간을 이룬다고 말한다. 가령,

    모든 장미는 꽃이다.
    어떤 꽃은 빨리 시든다.
    따라서 어떤 장미들은 빨리 시든다.

    와 같은 삼단 논법을 제시했을 때 대학생의 과반수이상이 이 추론이 맞다고 응답한다. 하지만 이 추론은 틀렸다. 빨리 시드는 꽃들 중 장미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미의 유통 기간은 코스모스나 나팔꽃에 비하면 몇 십 배나 길다.

    왜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판단을 할까?

    카너먼은 그 이유를 인간이 가진 생각 패턴에서 찾는다. 우리 생각은 두 가지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직관적으로 빠르게 직관하는 시스템(system 1)이고, 다른 하나는 천천히 비교적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고려하는 시스템(system 2)이다. 대개 우리 생각은 이 두 가지 시스템을 상호보완적으로 사용해 의사결정을 한다.

    그런데 전혀 합당하지 않은 결론을 내릴 때가 많은데, 이는 시스템 2가 잘 작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스템 1이 내린 잘못된 결정에 대해 시스템 2가 흔히 그럴싸한 ‘변명’을 하기 때문이다.

    카너먼은 그 생각의 오류를 이끄는 고정관념을 휴리스틱스(heuristics)라고 칭하고 있다.

    카너먼은 인간은 과신, 극단적 예측, 성급함 등과 같은 다양한 인식의 특성으로 인해 더 쉽게 더 자주 시스템 1의 노예가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니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노력이 요구된다. 

    “시스템 1에서 기원하는 오류를 막는 방법은 원칙적으로 보면 간단하다. 당신이 인지적 지뢰밭에 있다는 신호를 인식하고, 속도를 줄이고, 시스템 2에게 더 많은 도움을 요구하라”

    대니얼 카너먼의 충고 역시 자신의 ‘그림자’를 응시하며 늘 반성하고 깨어있으라는 것이다. 때로 어리석음으로 인해 후회막급한 일이 생길 수 있다. 과연, 그때 그 자들이 그런 성급한 자기합리화나 오판을 하지 않았다면 그 꽃다운 아이들이 그리 허망하게 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카너먼의 연구와는 조금은 다른 차원에서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거론한다. 대니얼 길버트는 미래에 대한 헛된 상상이 일을 그르친다고 말한다. 인간의 고유 특성인 멋대로 상상하기는 적어도 몇 가지 오류를 가진다. 우선 상상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를 놓치거나 적당하지 않는 정보를 마음대로 끼워 넣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상상하는 미래의 감정과 그 미래가 당도해서 느낄 현실의 감정이나 판단이 달라질 때가 대부분이다. 장애가 없을 때 우리는 장애인이 되면 불행할 것이라고 여기지만, 정작 장애를 갖게 된 후 그의 행복도는 전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그때그때 다르게 상상하는 존재이다.

    필시, 그 절대절명의 시간에 어리석은 그 몇몇은 아주 얼토당토하지 않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함부로 욕망에 기대지 마라.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함부로 상상하지 마라.’

    허망한 죽음의 시공간을 목도하며, 한때 그림자에 갇혀도 보았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생각은 이런 것들이었다.

    헬로스마일 심리센터 원장 /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