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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도, 잔인한 4월이 우리 마음에서 여전히 끝나지 않은지라, 5월이 되었지만 가족 앞에서 잘 웃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나도 마음 한 편 그러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려면 부모의 미소가 필요하다.
나는 박목월 시인을 어릴 적부터 좋아했고, 또 그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석사논문을 쓰던 시절은 내 생에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나는 당시 학내 사태 한 가운데에 있었고 그로 인해 학교를 떠나야 하는 사정이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으며 학위라는 별것 아닌 것을 따기 위해 악전고투했다. 더는 쓸모없어진 학위를 포기 못한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말리던 대학원 공부를 하다가 절망 끝에 선 내 신세를 슬퍼할지 모를 어머니 생각에, 그 마지막 한 학기를 힘겹게 버텼다. 박목월 시인 역시 어머니에 대한 정이 지극했고, 그의 시집《어머니》는 낳아 길러주신 어머니에 대한 헌사로 온통 채워져 있다. 서울생활을 접고 시골로 내려가, 어머니에게 석사논문을 건네자, 어머니는 고생했다며 말없이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렇듯 많은 부분 우리가 이 힘든 삶을 지탱하게 하는 것도 가족이다.
박목월 시인의 시는 가족이 중심을 이룬다. 그의 시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우리 삶에서 가족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박목월 시인 역시 한때 가족에게 못할 일을 저질렀다. 그는 한때 어린 제자와 바람이 나, 가족을 버리고 제주도로 도피해 살았다. 그 일은 주변 모두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돌아왔고, 한참 동안 참회의 시를 썼다.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깊은 페이소스는 한참을 살아도 잘 살기 어려운 인생과 가정에 관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내가 가장 아끼는 그의 시는 <가정>이다. 이 시가 시인의 시 중 가장 애착하는 시가 된 것은 실은, 딸 예나가 태어나서부터였다. 나는 아이가 돌이 될 무렵 한 달에 돈 백 만원도 제대로 못 버는 시절을 견뎌야 했다. 그런 처지가 되고 보니 그제야 이 시가 마음에 덜컥 들어섰다. 세상은, 늘 그럴 테지만 나라는 한 인간을 돌보지 않는다. 시의 화자는 그런 비정을 알고 있다. 그는 이 시에서 인생은, 세상은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험난한 곳이라고 비유한다. 시 가운데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여기는/지상.//연민(憐憫)한 삶의 길이여./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이라는 구절은 시인이 준엄하게 느낀, 인생의 짙은 고단함을 노래한 부분이다.
시인의 표현대로, 여전히 지금의 우리 삶과 사회를 떠올릴 때 얼음보다 더 차갑고 냉혹하게 느껴진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인은 스스로를 타이른다.
“아니 지상에는/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존재한다./미소하는/내 얼굴을 보아라.”
자신의 미숙성을 자각하면서도 끝내 자녀에게만은 미소하는 얼굴을 보이고자 하는 깊은 뜻을 나는 이제 안다. 나 역시 나의 딸에게, 아들에게 그러한 그윽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아직 예나가 어려서 보여주지 않은 영화가 있다. 딸 예나가 조금 자라면 보여주기 위해 아끼고 또 아껴둔 영화이다. 이탈리아의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로베르토 베니니의『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이다. 자신이 감독하고, 또 직접 주인공으로 분해 열연을 펼친 가족영화이다.
때는 나찌가 인간의 비참을 송두리째 보이던 2차 세계대전 말이다.
아내와 헤어져 사랑하는 어린 아들 죠수아와 함께 나찌 수용소에 갇힌 귀도는 아들의 동심을 지키기 위해 참혹한 수용소가 마치 휴양지나 지상낙원인 것처럼 꾸미는 해프닝을 벌인다. 아빠 귀도의 노력 덕에 죠수아는 잔혹한 나찌의 학살과 만행 한 가운데서도 세상은 밝고 긍정적인 곳이라는 점을 배워나간다.
하지만 때로 인생은 한 인간의 노력만으로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엄정한 것이다.
이 영화의 압권은 귀도가 나찌 군인에게 잡혀 총살을 당하는 장면이다. 그는 총살을 당하기 직전, 죠수아 앞에서 한 번 더 극적 연기를 펼친다. 자신의 죽음을 직면한 바로 그 순간 귀도는 죠수아가 마지막으로 기억할 아빠의 아름다운 미소를 선사한다. 그리하여 아빠 귀도는 무참히 죽으나, 죠수아는 아빠와 세상을 향해 진심으로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영화는 가족과 부모의 의미를 가르친다. 심리학자 조지 베일런트의 표현대로 인생은 기쁨과 비탄으로 정밀하게 직조되어 있다. 생은 슬픔과 행복이 굽이치는 골짜기이다. 게다가 우리는 삶의 어둠에 경도되기 쉬운 존재이다. 우리가 어른으로 살며 세상의 비정을 알게 되고, 때로 그 비정을 넘어서기 위해 온힘을 다해야 하지만, 내 아이만은 아름다운 미소로 지켜내야 한다.
나는 상담실 안에서 비관주의를 조금 일찍 배운 아이들을 만난다. 아이에게 자신이 살아온 생애에 비해, 너무 많은 슬픔과 상처와 고통들이 쌓이면 아이는 결국 비관주의를 배운다. 그리고 소아우울증이라는, 아이가 결코 이르러서는 안 될 참담한 지경에 이른다.
인과적으로 그 부모는 생의 비관성을 가르치는 교사일 때가 많다.
나는 만약 그 아이의 부모가 있다면 박목월 시인처럼, 귀도처럼 하라고 일러준다. 자신이 비록 못났고, 자신의 삶이 힘들고, 자기가 사는 세상에 대한 미움이 아무리 클지라도, 바깥 삶을 마치고 대문을 열어 집으로 들어설 때면 자녀에게 활짝 웃어주라고 당부한다. 내 아이가 잠들기 전까지 하루 세 번은 ‘사랑한다’고 속삭이라고 설득한다.
그것은 당신이 한 인간이어서가 아니고, 아버지이고 어머니인 까닭에 반드시 따라야 하고 지켜내야 할 의무라고 설명한다. 아이에게는 내일을 살아갈 삶에 대한 긍정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아이의 삶에서 희망이 사라져서는 안 되는 이치인 까닭이다.
헬로스마일 심리센터 원장 /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 저자
[박민근의 심리치료] 비록 슬프더라도 아이에게만은 웃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