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근의 심리치료] 상처와 치유의 심리학
맛있는교육
기사입력 2014.04.21 16:30
  • 임하는 상담 모두가 항상 경이롭고 각별하지만, 상담을 진행하다 보면 조금은 더 마음을 흔드는 사례도 있다.

    몇 해 전 만났던 유라씨 사연은 지금 떠올려도 여전히 가슴 시린 것이었다.

    어릴 적 힘든 가정에서 자란 유라 씨는 부모는 있었지만,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 뛰어든 유라씨 삶은 내도록 순탄치 않았다.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 아이를 가졌고, 잠시 안정된 삶을 사는가 싶었지만, 남편의 외도와 경제적 무능으로 인해 곧 이혼하고 말았다. 게다가 시댁 식구의 성화로 딸과도 생이별했다. 이혼 후 다시는 딸과 만날 수 없었다.

    그 후 그녀는 생계를 위해 보육교사 자격증을 땄고, 당시 작은 어린이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헤어진 딸 또래의 아이들을 보살피며, 오히려 심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항상 헤어진 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자신의 삶이 하나도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고, 심한 자살충동까지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고민 끝에 나를 찾았다.
    그녀는 내게 세상에는 이길 수 있는 상처도 있지만, 당시 자신이 겪었던 상처만큼은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나는 그때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어떤 상처라도 끝내는 극복될 수 있는 까닭이다.

    오랫동안 심리학자들조차 마음의 깊은 상처는 마음에 뿌리를 내린 채 사는 내내 그 당사자를 괴롭힌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대심리학에서는 이제 상처의 영구성을 부인하는 주장들이 지배적이다.  

    긍정심리학의 창시자이며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심리학자 가운데 한 명인 마틴 셀리그만은 일반인에게는 조금 낯선,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이란 심리개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외상 후 성장이다. 극심한 역경을 겪은 후, 상당히 많은 사람이 종종 PTSD(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수준에 달하는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증을 보인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 그들은 성장한다. 장기적으로 그들의 심리적 기능 수준은 전보다 더욱 높아진다.”

    나는 유라 씨에게 상처는 언젠가 아물 것이고, 지금과 같은 고통의 시간도 결국에는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거듭 설득했다. 

    그러자 유라 씨는 내게 자신이 이 상처를 견뎌내기 힘든 진짜 이유에 대해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그녀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큰 비밀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중학교 2학년이던 때, 불량배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 일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고통스러운 기억이라고 했다. 그리고 유라 씨는 그 비밀을 심지어 부모나 전 남편에게조차 말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여태껏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그때 겪은 치명적인 상처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과연 한 번 생긴 마음의 큰 상처는 영영 지울 수 없는 일일까?
    상처는 언젠가는 반드시 극복된다.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베일런트는 가장 오래된 성인발달연구를 40년 이상 진행하고 있다. 그가 이끄는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팀은 1930년대에 하버드대에 입학한 2학년생 268명과 일반인 남성 456명, 그리고 천재 여성 90명에 대한 76년에 걸친, 인생행로와 변화하는 생각, 성장, 그리고 행복의 측정치를 추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간에게 영구적인 상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아주 극심한 역경을 겪어야 했던 아이들조차 그들이 자라 어른이 되거나 노인이 되었을 때 행복도가 일반인과 별반 다르지 않거나, 오히려 더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기존의 심리 연구의 많은 고정관념을 뒤엎는 결론이기도 하다.

    “하버드 연구 대상자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게 노년에 이른 사람과 최악의 노년에 이른 사람의 유년기를 비교해 보았을 때, 둘 사이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어린 시절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이 있었다거나, 일찍 대소변을 가렸다거나, 늘 감기를 달고 살았다거나, 신경이 예민한 어머니를 두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정서적으로 불안해지거나 불행한 노년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었다. (…) 고아로 자라난 사람이라 해도 80세 즈음이 되면 부모 품에서 사랑을 받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게 행복하고 기운이 넘칠 수 있다는 얘기다.”

    상담을 하다보면 유라씨처럼 인생사에 시달리다가 생의 의욕을 잃거나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이들을 자주 만난다. 그럴 때면 나는 항상 이 베일런트의 연구를 들려준다. 유라 씨에게도 조금은 상세하게 행복과 불행의 변증법을 알려주었다. 

    삶에서 절망은 단지 일시적인 일이라고. 그러니 사람들이 고정된 무엇이라 여기는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트라우마란 단지 하나의 기억이며, 그 기억은 생각하는 이의 판단에 따라 극한 고통일 수도 있고, 단지 하나의 객관적인 사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유라 씨에게 물었다. 당신 삶의 모든 요소가 불행으로만 들어차 있느냐고. 당시 그녀의 대답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비록 지금 하는 일은 힘들었지만, 그녀의 동료들은 무척 따뜻하고 배려심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유라씨의 처지를 아는 몇몇 동료들은 자주 그녀와 함께 저녁을 먹었고, 주말에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또 적지만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면서 그동안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경제적 어려움에서도 이제는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몇 달 전 우연한 기회로 안 남성이 있었는데, 그 남성이 유라씨에게 얼마 전 교제를 제안했다고 했다. 그 남성은 유라씨가 판단하기에도 정말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남자는 자신에게 아이가 하나 있음에도 이렇게 그녀에게 교제를 요구하는 것이 염치없는 일 같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누군가와 다시 결혼을 한다는 것이 두려워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상처가 그와 만나는 일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상담을 통해 그녀가 자신의 삶 안에 촘촘히 박힌 긍정의 요소들을 더 또렷이 볼 수 있도록 도왔다.

    조지 베일런트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고통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인생에서 ‘기쁨과 비탄은 섬세하게 직조되어 있’어서 고통에는 항시 밝은 뒷면이 존재하며, 우리는 적응과 성숙을 통해 어떠한 ‘쇳조각도 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우리가 맞닥뜨리는 인생의 상처들은 결국에는 성장을 위한 밑거름인 것이다.

    얼마 전 유라 씨에게서 반가운 전화가 한 통 왔다. 그와 결국 재혼을 했고, 또 아이를 낳았고, 요즘 난생 처음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헬로스마일 심리센터 원장 / ≪당신이 이기지 못할 상처는 없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