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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뛰논다/하늘의 무지개를 보노라면/내 인생이 시작했을 때도 그러했고/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다/늙어서도 그러하길 바란다/아니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바라건대, 내 하루하루가/자연의 경건함으로 채워지기를
-워즈워드, <무지개>
아이는 도덕성이 부족했다. 올해 중 2인 도연이는 학교에서 여자아이를 추행했고, 강제 전학을 당할 뻔한 것을 겨우 부모들이 피해자 부모와 학교에 사정해 무마할 수 있었다. 여자아이의 집을 찾아가 부모는 손발이 달도록 빌어야 했다. 도연이의 아버지, 어머니는 이런 일을 겪으며 마음이 모두 녹아버렸다. 아버지 정수씨는 대기업의 임원이었고, 어머니 지나씨는 모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두 사람 모두 박사까지 받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정수씨, 지나씨 모두 도덕성에 큰 문제가 없는, 어쩌면 퍽 양심 바른 사람들이었다. 싫다는 여자아이의 부모를 끝내 설득해 만났고, 진심으로 사죄와 용서를 빌었다. 그러니 이 일은 내도록 황망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어째서 이런 사단이 일어났던 걸까? 상담실에 앉은 지나씨는 내내 눈물을 흘렸고, 정수씨는 망연자실한 표정 그 자체였다.
문제는 중심 잃은 삶이었다. 성공과 일에 바빴던 정수씨 부부는 아이를 살뜰히 보살필 수 없었다. 10살 전에는 늙은 노모가 도연이를 보살폈고, 10살 이후 도연이 할머니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대신 학원과 과외선생들이 아이를 돌봤다.
도연이가 과외를 하는 이유는 다른 아이와는 달랐다. 엄마, 아빠의 귀가는 항상 늦었고, 혼자서 집에 있는 것을 몹시 싫어했던 도연이를 위해, 거의 매일 번갈아 가며 다른 과외선생들이 와서 도연이와 시간을 보냈다. 과외선생이라기보다는 보모에 가까웠다.
도연이는 초등학교 졸업 무렵부터 마치 예정된 것처럼 게임과 포르노에 빠져들었다. 두 번째 상담에서 도연이에게서 포르노를 보고 나면 불안을 잊고, 위로를 받는다는 고백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는 “보는 이유가 다른 아이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야동을 보고 나면 마음이 안정되고, 어쩐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도연이는 그런 기분을 절실하게 느꼈다. 아이는 안타깝게도 사랑과 불안해소조차 분간하기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 사건이 벌어지던 날, 평소 친했던 그 여자아이와 도연이는 강당에 남아 함께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 여자아이가 자신을 보고 연신 웃었는데, 뭔가를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강제로 옷을 벗기려다 여자아이는 도망쳤고, 도연이는 교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학생부실에서 반성문 수백 장을 쓰며 처분을 기다려만 했다.
나는 도연이에게 정말 그 여자아이가 웃은 것이 그러라고 허락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지, 아니면 도저히 어떤 충동을 참을 수 없었는지를 물어보았다. 아이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 기분이나 생각이나 감정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도연이의 머리와 마음은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처럼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렇게 잘 알 수 없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결코 네 탓이 아니니 자신을 질책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도연이는 그럴 때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말로 자신이 모든 것을 망쳤다며 울었다. 죄인처럼 학교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엄마 아빠를 바라보며 죽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왕따나 폭력, 패륜과 같은, 도덕성이나 성품의 문제를 겪는 아이들을 만나면 그들에게 영성을 가르친다. 영성을 배울 수 있는 감상 자료들이나 치유서를 아이의 독서능력에 맞게 치밀하게 구성해 읽게끔 한다. 이런 일이 생긴 경우, 충동조절이나 문제행동 교정보다 영성치유가 더 근본적인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이는 비단 도연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부모들 역시 바른 삶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지나씨와 정수씨에게도 제법 많은 묵직하고 진중한 과제를 제시했다. 청소년의 인생 목표상실을 비판한, 석학 윌리엄 데이먼의『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나 미국의 유명한 양육학자인 크리스틴 카터의『아이의 행복 키우기』, 무조건적인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 심리학자 알피 콘의 부모지침서『자녀교육, 사랑을 이용하지 마라』가 주 연구과제였고, 여러 편의 자녀양육에 관련된 영상들도 이와 함께 감상하도록 목록을 제시했다. 다큐멘터리『아이의 사생활 - 도덕성』은 두 사람의 가족과 자녀에 대한 생각을 다시 근본적으로 되짚어보도록 했다.
가족 모두가 함께 읽은 것도 몇 편 있었다. 도연이에게도, 지나씨와 정수씨에게 처음 읽도록 했던 책은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들이었다. 게 중 도연이와 내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소설은『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어쩌면 이번 일과 연관이 없어 보이는『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주목한 것은, 이 소설이 도연이의 마음을 채울 진실한 질문들을 품고 있었던 까닭이다.
구두수선공 시몬은 가난하게 살아간다. 집에는 코트가 하나밖에 없어 아내와 번갈아 입어야 하는 처지였다. 열심히 일해, 그동안 밀렸던 외상값을 받으면 한 벌의 코트를 만들 만한 양가죽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외상값을 받으러 가보니 모두 돈이 없었다. 낙망한 시몬은 홧김에 술을 마시고 길을 가다, 교회 근처에서 벌거벗은 미하일이란 청년을 만났다.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자신의 코트를 입혀 집으로 데려온다. 시몬의 아내 마도료나는 기가 막히고 화가 났지만, 불쌍한 마음에 그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그때 미하일은 그녀를 향해 처음 미소를 짓는다. 시몬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미하일에게 구두수선을 가르치고, 1년이 흐르자 미하일의 수선 솜씨가 소문이 나, 손님들이 찾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신사가 찾아와 장화를 만들어달라고 하자, 미하일은 장화 대신 시신에게 신기는 신발을 만든다. 시몬은 의아해 했지만, 과연 신사의 하인이 찾아와 신사가 죽었으니 망자를 위한 신발을 지어 달라 부탁한다.
미하일은 만든 신발을 건네며 두 번째 미소를 짓는다. 또 어느 날 두 아이를 데리고 한 여인이 가게를 찾았다. 그 여인은 부모가 죽어 고아가 된 두 여자아이를 기르고 있었다. 그때 미하일은 세 번째 미소를 지었다. 미하일은 천사였다. 그 여인이 대신 기른 쌍둥이를 낳은 친엄마를 하늘로 데려오라는 하나님의 말을 거역해, 그 벌로 지상에 벌거벗은 채 내려온 것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해 답하면 다시 하늘로 올라올 수 있다고 했다. 세 번의 미소는 세 번의 깨달음이었다.
미하일은 시몬에게 마도료나에게 미소를 지은 것은 첫째 답 ‘연민’을 알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 망자의 신발을 건네며 지은 미소는 ‘죽음의 불가피성’을 알았기 때문이며, 세 번째 미소는 사람들의 ‘이타심’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의 세 질문은 이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 답은 각기 사랑, 죽음, 박애였다.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으니 타인을 깊이 사랑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정수씨에게 심지어 가족임에도 당신의 가족 안에는 사랑이 비어있었다고 전했다. 어디에 쫓기듯 허상들을 쫓다 보니, 아이에게 사랑과 연민과 인륜을 가르치지 못했다고. 정수씨와 지나씨는 회한의 표정을 지었다. 매일매일 부모와 자녀가 만나야 하는 것은 아이들이 세상에 아무 보호 없이 ‘알몸’으로 나서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다시 이 가정의 중심을 세우자면 큰 가르침이 필요했다. 내가 20년 가까이 그 뜻을 섬긴 스승인 퇴계 이황의 영혼의 온기가 필요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퇴계 이황의 자녀교육을 찬찬히 설명했다. 퇴계는 아침 문안을 온 자녀를 문밖에 기다리게 하고 늘 의관을 정제했다. 단지 부모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녀에 게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서 대해기 위해서라고 했다.
퇴계가 자식과 후손들에게 수천 통의 편지를 전한 사연을 들려주며, 몇 구절을 직접 읽게도 했다. 퇴계는 언제나 나이가 제법 든 아들에게도 몸과 마음의 흐트러짐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는 도연이 부모에게 비록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흘렀어도, 그것이 부모의 지극한 사랑이며 책무라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정수씨와 지나씨에게 보인 내용 중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다음 대목이었다. 퇴계가 아들에게 준 편지 중 하나이다.
“너의 귀마개는 …… 간신히 좀 괜찮은 것을 구해 만들어 보낸다. 네가 무척 기다리는 줄은 알지만 이처럼 늦어지고 또 좋지 않은 것을 보내니 안타깝구나. 하지만 의복을 좋은 것으로만 입으려는 것은 큰 병이니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이 점을 유념하여라. …… 나는 아직 관복을 다 갖추지 못했는데, 단지 한 벌만 만들 심산이다.”
퇴계가 아들에게 검소함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편지 가운데 하나이다. 퇴계가 자녀에게 보낸 서신은 검소함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이 대중을 이룬다. 하지만 자신의 관복조차 아직 마련되지 않은 터에 아들의 귀마개부터 챙기는 애정이 엿볼 수 있는 편지이기도 해서 내가 퍽 아끼는 하나이다. 나의 설명에 지나씨와 정수씨는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그 후 도연이와는 다른 톨스토이의 단편들로도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누었다.『바보 이반』이나『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땅이 필요한가?』를 읽고 이야기했다.『바보 이반』으로는 성실의 중요성에 대해서,『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땅이 필요한가?』으로는 탐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지나씨 부부에게 도연이의 영성 교육에 필요한 대화와 작품 향유 방법들과 자료 목록을 전했다. 저 아래로 꺼져 있는 우물 같았던 아이의 표정은 차차 복사꽃처럼 밝아져갔다. 이 번 일이 악마 같은 소행이나 치욕스러운 사건이 아니라 단지 미숙한 소년이 한번쯤 겪을 수 있는 인생 고비라는 점을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런 스스로의 자각만으로 낙인찍힌, 싸늘한 주변의 시선을 모두 감내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내 조언대로 아이는 멀리 경기도의 한 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공부보다 독서나 가족과의 대화가 중요하며, 성공보다는 사랑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그들은 성실히 따랐다. 지나씨는 휴직이나 퇴직을 결심했다. 그동안 못 안아준 만큼 넘치는 사랑을 주겠다고 결심했다. 정수씨 역시 일을 줄일 수 있는 현명한 방법들을 찾았다. 들어서만 알던, 파레토의 20:80 법칙을 머리가 아닌 삶으로 실천하겠다고 했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빌프레도 파레토는 대개 일의 80퍼센트 성취는 20 정도의 노력만으로 달성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그 모자란 나머지 20퍼센트를 채우려고 아까운 80퍼센트의 정력을 낭비한다. 우리가 일과 삶의 균형을 잃는 아둔함에 빠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연이 가족은 이제 주말마다 1박 2일로 캠핑을 다닌다. 그리고 가족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을 차근차근 배워가고 있다.
세 번째 상담쯤에서 내가 건넨『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고 난 도연이에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도연이의 삶에는 무엇이 부족하니?”
“…… 사랑이요. ……”
헬로스마일 소아청소년 심리센터 원장 / 퇴계문학치유연구소 소장
[박민근의 심리치료] 아이는 무엇으로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