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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시들해졌지만 한동안 자기주도학습 열풍이 거셌다. 어폐가 있는 말이나 아직도 아이에게 자기주도학습을 강요하고 있진 않은가? 아이의 ‘자율성학습’에 대한 부모의, 혁신적인 생각전환이 필요하다. 사실 자기주도학습은 방법이 아니라 마음이다.
우리는 외국 문물을 가져와 우리 것으로 만드는 일을 자주 해왔다. 구식 자동차 엔진을 가져와 연구와 혁신을 거듭해 자동차 생산대국이 되었고, 폐선을 가져와 수리하고 기술을 연마해 조선입국이 되었다.
최근 범람하는 자기주도학습 이론 역시 서구의 학습방법론을 그대로 본떠와 우리에게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실 학습에 관한 한 그럴 필요가 없다. 자기주도학습에 관한 최고의 전문가는 우리 역사 안에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잘 아는 율곡, 퇴계, 다산은 모두 자기주도학습에 관한 최고의 연구가들이다.
예전 ‘신독(愼獨)’이라는 유교 개념을 윤리 시간에 배운 적이 있을 것이다.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 처음 나오는 말이다. 해석에 대한 이론이 없는 것이 아니나, 대체로 신독은 다른 이가 보거나 듣지 않는 곳에서 혼자 있는 때도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이르는 말이다. 도덕률과 이어진 자율성인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특별한 신독 이론을 펼치는데, 단순히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스스로의 행위와 생각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부정적이거나 정의롭지 못한 생각을 품지 않아야 한다는 데까지 신독의 개념을 확장한다.
반면 미국의 실험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얼마나 도덕적인 면에서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연구결과를 자주 제시해왔다. 실험에서 평범한 인간은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 규칙을 어겨서라도 이기거나 성과를 얻으려는 부도덕한 모습들을 자주 드러낸다.
우리 부모들은 다산이나 퇴계를 믿기보다는 아마 미국의 실험심리학자들의 결과를 더 신뢰할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를 혼자 두는 것을 걱정한다. 태형이네 부모는 맞벌이를 한다. 그래서 태형이는 학원에 다녀와서도 몇 시간은 혼자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 태형이는 얼마 전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엄마의 주민번호를 도용해 음란물 사이트에 접속했던 것이다. 그 청구 비용이 수십만 원에 달했고, 엄마는 그 일로 실신 직전까지 이르렀다.
본래 과잉행동증후군 때문에 상담실을 찾은 것이긴 하지만, 이점이 더 큰 걱정이었다. 엄마는 요즘도 혹시 아이가 돈이 들지 않는 음란사이트를 전전하며 엄마가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포르노는 절대 아이에게 접하게 해서는 안 될 대상이다. 포르노는 마약과 같아서 일단 아이가 접하게 되면 끊기가 무척 어려운 대상이다. 포르노는 아이의 성적 욕망을 폭발적으로 증폭시키는 도화선이 된다. 나이가 어릴수록 심각성은 더 하다.
태형이의 문제는 포르노를 즐겨본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엄마에게 수시로 거짓말을 하는 것이 더 문제였다. 아이는 난처한 상황에 이르거나 자신의 이해가 달린 문제에 봉착했을 때는 빈번하게 거짓말을 했다. 벌써 엄마가 알고 있는 굵직한 거짓말만 해도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많았다.
태형이 엄마는 맞벌이를 그만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일로 고심하는 부모들이 많다. 아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의 거짓말을 한다는 통계도 있다.
아이들은 과연 신독하기 어려운 존재일까? 아이들은 본래 혼자서 자신의 문제를 감당하거나 도덕적으로 처리할 능력이 부족한 것일까?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 본성은 본질적으로 진실하다고 단언한다. 또한 이 아름다운 본성을 기르기 위해 부단히 연마하고, 강한 내적 실천을 감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실 이 세상은 비도덕을 회유하는 악덕들로 가득 차 있다. 악덕이 넘치는 세상에서 아이들의 아름다운 본성을 지키는 일은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이다.
만약 아이의 심성을 해치는 부도덕성이 아이의 내면에 자라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제대로 된 도덕적 자극과 훈육을 받지 못해서이다. 인간의 선한 본성은 실험실에서도 확인된다. 실험실에서는 돌이 채 되지 않은 유아들조차 정의와 선에 대해 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10개월짜리 유아조차도 남을 해치는 존재보다는 남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를 아무런 주저함 없이 선택한다. 남을 해치는 존재에게는 부정적인 표정을 짓고, 남을 돕는 존재에게는 긍정적인 표정을 짓는다.
문제는 결국 주변 어른과 사회가 본성적으로 정의와 선을 더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그 본성이 꽃필 수 있는 충분한 도덕적 자극을 주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적 능력, 특히 자기조절 능력은 신성한 경지까지 상승할 수 있는 대상이다.
이제 내 아이에 대해 이런 판단을 갖기 바란다. 내 아이는 본성적으로 신독할 수 있으며, 좋은 자극과 훈련을 거듭하면 큰 고통 없이도 신독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숭고한 존재이다.
태형이 부모님과 나는 세상과 도덕성에 관해 긴 상담을 수차례 이어갔다. 부모님은 지금의 태형이의 상황이 충분한 도덕적 자극이 부족해서 생긴 결과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덕성 교육에 관한 전체적인 마스트플랜을 제시했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신의 아이가 자신에게 솔직하고 심성 또한 곱기를 바랄 것이다. 나아가 부모라면 누구나 아이가 누구의 간섭이나 감시가 없을 때도 스스로 학습을 지속하고 자기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진정한 자기주도학습은 사실 아이가 학습에 관해서 신독을 지키는 것이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아도 스스로 학습을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자기주도학습이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는 것이다.
퇴계 이황은 우리의 상식과 달리 결코 천재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책 읽기를 좋아하고 시 짓기를 즐기기는 했으나 타고난 문재가 아니었다. 그런 탓에 과거 시험에 3차례나 낙방하며 큰 상심에 빠지기도 했다. 실의에 빠져 있던 퇴계는 동양의 심리학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심경(心經)’을 읽고 자기조절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되었다. 퇴계는 이후 몇 년간 더 흐트러짐 없이 공부에 정진했고 결국 과거에 붙을 수 있었다.
신독에 관한 경구 가운데 ‘행불괴영(行弗愧影)’이란 말이 있다. 혼자 다녀도 자기 그림자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이다. 그만큼 엄격해야 신독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런 자기를 흐트러짐 없이 지키는 능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끊임없는 도덕성 훈련을 통해 자기원칙을 세우고, 오랜 훈련을 통해 자기조절 능력이 높아진 아이라면 자신의 희망과 꿈을 위해, 혹은 도덕적인 원칙에 따라 어떤 일이나 공부를 하면서 쉽사리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공부의 도를 말한다고 한다면 나는 단연 이 ‘신독’의 마음가짐을 가졌느냐를 꼽을 것이다.
나는 태형이에게 도덕성 발달 독서치료를 진행했다. 태형이는 톨스토이의 단편집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부터 읽게 했다. 태형이 부모에게 아이의 인생행로에 도움이 될 수백편의 책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좋은 책이 많은 줄 몰랐다며 태형이 부모님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나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아이가 읽고 또 읽게 해 아이를 바르고 지혜로운 ‘마음밭’으로 이끌어달라고 당부했다. 부모의 도덕적 잔소리보다는 아이 스스로 신독을 깨닫는 경험과 환경이 중요하다. 특히 도덕성과 관련된 책을 지속적으로 읽는 것은 가장 좋은 도덕성 발달 활동이다. 도덕성을 키우라고 말로 해서는 도덕성이 잘 자라지 않는다. 스스로 깨우쳐야 도덕성은 마음 안에 자리 잡힌다. 그리고 도덕적인 아이를 되어야, 신독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성현들이 깨달은 핵심원리이다.
헬로스마일 소아청소년 심리센터 원장 / 퇴계문학치유연구소 소장
[박민근의 심리치료] 진정한 자기주도학습이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