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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는 왕따를 당해 학교를 자퇴한 뒤 집밖을 잘 나가지 않았다. 수면장애와 심한 무기력증을 호소하는 은서에게 이제 삶의 희망은 몇 가닥 남지 않았다. 은서는 자신이 왕따를 당하도록 방치한 사회와 부모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고, 그로 인해 집안 구성원들과의 불화도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만 갔다.
나는 은서에게 요즘 ‘희망’이라는 단어를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유리벽 속에 든 은서는 좀처럼 세상을 향해 작고 가녀린 손을 뻗지 않는다.
어린이 심리상담을 하며 가장 안타까울 때가 내담 아동이 왕따로 인해 무서운 고통을 겪었을 때이다. 설사 아이가 겉으로 고통을 호소하지 않고 편안해 보인다 하더라도, 왕따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커지는 트라우마의 진원지가 된다.
분명한 것은 왕따를 방치하면 피해 아동은 ‘심리적 살해’를 당한다는 사실이다. 사회나 어른들은 왕따로 인해 상심한 어떤 아이가 아파트 고층에서 떨어진 후에나 이 문제에 대해 뜨뜻미지근한 관심을 가져보지만,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자살을 감행하지는 않았지만, 심리적 살해를 당한 채 세상을 살아가는 대다수 나머지 피해 어린이들이다.
그러니 이 왕따에 대해서만은 침착한 어조가 아닌, 보다 엄정하고 강경한 대응과 호소가 필요한 것이다.
부정하고 싶은 이론이지만, 진화심리학에서는 왕따를 인간의 본능적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참으로 무서운 가설이지만 왕따 현상이 집단의 응집력, 결속력 유지를 위해 희생양을 만드는 진화론적 집단본능과 관련이 있다고 기술한다.
왕따 문제에 관한 숱한 통계 자료에 나타나듯, 왕따와 교내폭력이 만연한 우리 현실을 감안한다면 우리 사회가 제도적, 도덕적 필터링을 등한한 채 왕따의 집단본능이 문화나 사회구조 안에 그대로 숨어들도록 방치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냉정히 우리를 자성해본다면, 사회 어디를 둘러봐도 지나친 경쟁과 상대에 대한 무고한 비난, 인신공격과 불신의 심리가 만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른들은 불신과 배제의 심리를 버릇이나 자랑처럼 드러내고, 아이들에게 이런 사악한 감성을 그대로 학습시킨다.
배운 대로 행하는, 지적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은 어린 아이들의 차별의식이나 왕따 본능은 때로 어른들보다 더 심하고 잔인하다.
진료실에서 피해 아동의 고백을 청취하다 보면, 나는 요즘 아이들이 참으로 무섭다. 때로 어른보다 더 극악하고, 욕설과 비난에 지나치리만치 둔감하고, 심지어 왕따를 즐기는 악마적 감성을 소유한 요즘 아이들이 참으로 무섭다.
누가 이런 괴물들을 만들어냈을까?
어느 날 은서는 고통의 기억을 헤집어, 선생님과 어른 앞에서 한없이 천진한 표정을 짓다가 자신을 향해서 야수 같이 돌변하는 아이 괴물들을 떠올리며 까무러칠 것처럼 자지러졌다. 그리고 진료실이 다 떠내려갈 것처럼 소리 내어 통곡했다.
“아무도 지켜주지 않았어요.”
“선생님은?”
“모른 체 했어요.”
분명 절규하는 은서를 방치한 것은 나를 비롯한 우리 어른과 비정한 사회였을 것이다.
정말 우리 인간종은 왕따 현상에 취약한,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존재들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은 왕따 정도는 능히 막을 수 있는 뛰어난 영적 존재이다. 인간은 고도로 발달한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종이다.
왕따 현상이 이토록 만연한 것은, 다만 우리 사회와 너무 세속을 추구해온 어른들이 그간 인간 본연의 이타성을 갈고닦는 연습을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타심의 문화를 실천하는 일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인간 본성은 본질적으로 친절하고 자비롭다고 단언한다. 또한 이 아름다운 본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부단히 연마하고, 크고 강한 내적 실천을 감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그는 현대인들이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는 편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왕따를 겪은 은서와 같은 아이들의 심리치유는 매우 어렵다. 세상 곳곳에 사회에 대한 강한 불신의 증거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 그들의 굳어진 마음은 쉽게 되돌리기 힘들다. 내 임상 경험상 표면적 완치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예외 없이 깊고 큰 영혼의 상흔을 남긴다.
은서는 말한다.
“내가 다시 괜찮아져도, 아이들은 왕따를 멈추지 않을 거예요.”
물론, 우리 사회가 맨 먼저 해야 할 것은 사회 곳곳에 왕따의 본능을 제어할 선한 마음의 세력과 힘을 키워내는 일일 것이다. 교실마다, 왕따를 행하는 아이보다는 왕따를 보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의로운 아이들이 많아지도록 길러내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한국 사회를 병들인 질시와 반목의 문화를 하루아침에 치유하기란, 깨끗하게 털어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왕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제도적 노력이 메울 수 없는 빈틈을 잘 알고 있다. 악마의 감성은 결코 입안가들이 내놓는 그런 엉성한 그물에 잡힐 만큼 둔한 대상이 아니다.
나는 사람의 더렵혀진 마음은 사람의 체온과 대화로만 고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지금 어디선가 왕따를 행하는 작은 악마들 역시도 일종의 피해자일는지 모른다. 세상과 매체에서, 집안의 부모에게, 주변 어른에게 못된 마음의 습성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마음의 피살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안다, 이 사회 어딘가에 병든 아이들의 심성을 치유하는 따뜻한 손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을 다시 인간적 품성을 가진 아름다운 존재로 되돌리는 우리 모두의 바람과 실천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너무도 순진무구한 생각이지만, 아이들을 몸과 마음으로 제일선에서 대면하고 있는 선생님들의 진지한 역할에 주목하고 싶다.
정말 간절히 나는 모든 초등학교나 중학교마다 다시 정의로운 호랑이 선생님들의 권능과 목소리가 번성하길 기원한다. 자기 밥그릇이나 챙기는 교육 관료나 철밥통 선생이 아니라 정의를 아는, 행하는 스승님의 사자후가 가득하길 바란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남을 괴롭히는 일은 참으로 나쁜 일이라고 배운 경험이 있다. 한 아이를 괴롭힌 우리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교실바닥에서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 반성문이 부실하거나, 우리의 뉘우침에 진심이 부족하면 반성문은 다시 여지없이 되돌려졌다.
울며 꿇어앉은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따끔하고도 절도 있는 목소리로 내내 이렇게 타일렀다.
“남을 괴롭히는 일은 결코 사람이 할 일이 아니란다.”
그렇다. 왕따는 사람이 행할 일이 절대 아니다.
헬로닥터브레인 연구소 소장/ 서울ND의원 우리아이 몸·맘·뇌 성장센터장
[박민근의 심리치료] 왕따 권하는 사회, ‘심리적 살해’를 당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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