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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30대 중반부터 임상에서 개인 독서치료를 한 지도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독서치료를 연구한 지는 20년이 넘었지만, 실제 내담자를 만나 독서치료에 기반한 상담을 진행하기 시작한 것은 10년이 되는 것이다. 독서치료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않고서 독서치료 임상을 진행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독서치료를 설사 공부했다고 해도 그것을 직접 임상에 적용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안타깝게도 내가 외서를 읽으며 독서치료를 독학하던 20년 전에 비해 우리의 독서치료 현실 역시 그리 나아진 것이 없다.
독서치료는 독서, 문학작품 감상이 가진 치유적 본질에 의해 존립하는 상담과 치유적 대화 방식이다.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영미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책 읽기, 문학작품 감상이 가진 존재 목적 가운데 하나는 탁월한 “치유의 효과”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 인생이 근본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이를 보완할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책과 문학이 가진 본질적 존재성인 타자성(他者性)이야말로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경감해줄 실효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읽는 이유는 사람들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정이 너무 취약하고, 위축되거나 사라지기 쉬우며, 공간과 시간과 불완전한 연민, 그리고 가정과 애정 생활의 온갖 슬픔으로 짓눌리기 쉽기 때문”이라고 답변하고 있다(해럴드 븜룸, ≪독서기술How to read and why≫ ).
이렇듯 독서는 치유를 수반하는 행위이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독서치료(Bibliotherapy)는 이러한 독서의 효용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임상에 적용하는 행위이다. ‘Bibliotherapy’는 그리스어 ‘biblion(책, 문학)’과 ‘therapeia(의학적으로 돕다, 병을 고치다)’를 합친 것으로 책, 혹은 문학으로 질병을 치료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독서가 작용하는 것은 마음의 병에 대한 치료적 측면이다.
서구에서 독서치료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이미 1920년 영국에서 발간된 대형사전에 이 용어가 수록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 독서치료는 사서와 의사, 심리학자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활발히 연구되어 왔으며, 지금은 서구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보편적인 심리치료 수단 중 하나로 범용되고 있다.
사실 인류가 문학의 치료적 효용을 인지한 것은 그 기원이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그리스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책에 문학의 치료적 효능을 개진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시학》에서 잘 빚은 문학작품은 사람의 감정을 카타르시스(catharsis)한다고 적고 있다. 《시학》에는 “비극은 어떤 행위를 모방한 것으로서 애련과 공포에 의하여 이것들의 정서 특유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라고 적혀 있다. 카타르시스는 묵은 감정을 씻어 내린다는 정화, 혹은 감정의 대리배설(또 감정의 정화라는 뜻과 함께 침, 타액, 변 등의 배출이라는 (한)의학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한의학에 바탕한 마광수의 카타르시스 이론이 탁월한 해명을 제공한다. 나는 대학원에서 마광수 교수에게 직접 이 이론을 사사받았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런 서구의 전통은 면면이 이어져오다가 현대에 와서 실제 치료적 임상에서 구현되고 있다.
미술치료나 음악치료, 놀이치료 같은 다른 심리치료 방법과 함께 현재 독서와 문학을 활용한 독서치료는 국제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치료 수단이다.
영국 가디언지에 따르면 2014년부터 영국에서는 ‘책 처방’이 전국적 의료서비스로 제공되고 있다. 책 처방이란 가벼운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증상을 겪는 환자에게 약물 대신 자기구제(self-help) 도서를 우선적으로 처방하는 공공의료 체계이다. 영국 보건당국은 데니스 그린버거의《기분 다스리기Mind over mood》와 같은 임상을 통해 그 효과가 검증된 30권의 자기구제 도서(self-help book)을 선정하고, 의사들로 하여금 우울증 환자의 치료에서 책 처방을 약물처방에 우선해 적용할 것을 지정하고 있다.
이는 영국에서 진행된 다년간의 임상을 통해 검증된 결과에 따른 것이다. 2013년 영국 보건당국은 오랜 임상 실험에서 수만 명의 환자들에게 독서치료를 처방해 큰 효과를 확인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영국 당국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례에서, 가벼운 우울증을 비롯한 다양한 심리문제의 경우 독서치료를 통해 완쾌되어 약물처방과 같은 추가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되는 수준까지 회복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영국의 진보적 행보에 대해서 서구 각국 언론도 유래 없는 찬사와 갈채를 보내고 있다. 독서치료는 지금 중요한 트렌트이자 세계적인 검색어이다.
세계적인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이 설립한 인생학교(런던 소재)에서 독서치료 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그는 인생학교의 독서치료 과정을 소개한 영상에서 독서치료를 통해 “환상적인(fantastic)”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인생학교에서 독서치료를 직접 진행하고 있는 엘라 베르투, 수잔 엘더킨이 지은 책《소설이 필요할 때The Novel Cure》(이 책에는 700권이 넘는 치유서(소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제목도 소설 치료라고 지었다. 대단히 유용한 목록이긴 하나 이는 한국적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에서는 독서치료, 특히 소설치료를 소개하며, “문학 애호가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의식적이든 아니든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 소설을 읽었다”며 문학의 고원한 치유능력을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독서치료의 연구와 계발, 임상은 난맥상을 겪고 있다.
독서치료라는 분야 자체가 독서학, 문학, 철학, 심리학 등이 조화롭게 융합된 통섭적 학문인데 반해, 국내 학문 풍토가 그간 분업화가 지속되고, 학문간 장벽이 높아져 온전히 이를 받아들일 만한 여건이 못 되기 때문이다. 비근하게 말하면 심리학을 배운 사람들은 문학을 잘 모르고, 문학을 배운 사람은 심리치료에서 관한 한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심리학 대학원에 가고, 심리학 석사를 받은 사람이 철학 박사 과정에 진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외국과 달리, 우리는 여전히 학자가 되는 것은 한 가지 학과에 올인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 이를 위반한 이들은 우리 학계에서는 아웃사이더가 되고 만다. 근본적으로 독서치료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 자체가 부재하는 것이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독서치료 분야의 패권을 두고, 문헌정보학과 심리상담학 학계에서 치열한 대립과 반목을 펼치는 실정이며, 상호 교류가 전무한 상태이다. 안타깝지만 한국적 대화 단절은 학문 분야에서 더 고루하고 저속하게 이루어진다.
그 사이 자격증 사업에 혈안이 된 몇몇 성인교육 업체들이 더욱 이 분야의 위상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이미 국내에서는 몇 개월 만에 독서치료사 자격증을 딸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귤화위지(橘化爲枳, 강남의 귤이 북쪽에서 자라면 탱자가 된다)’라는 고사처럼 척박한 국내 현실이 가장 뛰어난 심리치료, 철학상담 방법인 독서치료를 ‘탱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독서치료는 모국어 읽기가 가능한 대중, 남녀노소 누구라도 단지 공인된 치유서를 읽는 것만으로도 치유 효과를 경험할 수 있는 우수한 심리치료 수단이다. 그러나 독서치료가 아무나,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만만한 것은 아니다.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임상을 이끌기 위해서는 독서치료에 대한 탁월한 식견이 꼭 필요하다.
외국에서 공식적인 독서치료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대개 10년 이상의 긴 수련기간을 거쳐야 한다. 10년 이상의 수련기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충분한 심리치료 임상 경험과 더불어 수천 종의 치유서에 대한 깊이 있는 독서와 연구, 임상 적용 경험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 대 일의 대면상담에서 독서치료를 적용할 때나 내담자가 임상적으로 심각한 심리문제(중증 심리질환)를 가진 경우는 독서치료사의 높은 자질이 절대 요소이다. 하지만 국내에는 전문적인 독서치료사를 배출할, 제대로 된 고등 교육기관조차 부재한 실정이다(몇 군데 있지만 이름만 독서치료일 뿐, 커리큘럼 자체가 앞서 말한 독서치료의 본질에 거의 부합하지 않는다. 독서치료를 위해서는 문학연구와 철학상담 연구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데, 여기에 대한 교과 과정 배정이 전혀 이루지지 않는 실정이다).
따라서 일 대 일 대면상담의 임상에서 독서치료를 적용하는 심리치료사나 철학상담가 역시 현재 거의 전무하다. 당연히 국내에서는 해리 증상이나 정신분열증 같은 심각한 심리문제를 가진 내담자의 경우 상담에서 독서치료의 혜택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독서치료가 독서교육이나 독서토론 같은 차원으로 오해되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적 보편이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나, 해외에서는 일상적으로 심신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많은 혜택을 가져다주는 독서치료가 이런 여건들로 인해 국내에서는 거의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박민근의 힐링스토리] 독서치료의 한국적인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