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근의 힐링스토리] 대형사고와 한국인의 안전불감증①
조선에듀
기사입력 2015.06.22 10:05
  • 작년, 아직 피지도 못한 생명들을 무참히 앗아간 세월호 참사 이후, 나는 곳곳에서 사람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목격한다. 상담실이나 여러 모임에서 세상 사람과 사회를 비난하고 탓하는 이야기 역시 자주 듣는다. 가장 많이 들었던 내용은 우리의 못된, 아니 못난 근성에 관한 것이다.

    ‘안전불감증’, ‘한국 사람들은 왜 이리 안전에 둔감할까?’
    아마 작년 한 해 우리 모두가 가장 자주 이야기했던 주제일 것이다. 안전불감증에 대해 말할 때마다 자주 거론되는 것이 망각과 관련한 한국인의 특별한 심리이다. 삼풍백화점, 대구 지하철사건, 세월호 사건까지. 큰 사고가 발생하면 펄쩍 펄쩍 날뛰다가도 얼마 자나지 않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잊어버리는 ‘망각중독’의 심리 말이다. 쓰나미 같은 일을 겪고 나서도 이내 우리는 안전불감증에 빠진다. 전의 끔찍한 기억을 얼마 지나지 않고 잊어버리고 예의 끔찍한 사건을 맞이한다.

    지금 현재 메르스 사태를 지켜보는 우리는 또 한 번 이 공포의 악순환을 목격하고 있다. 안전에 신중을 기하지 않아 더 많은 실수를 범하는 뉴스를 매일 접한다. 가혹한 실험에 기억력이 바닥난 실험실 생쥐들처럼 우리는 모두 불행한 사태의 기억을 깡그리 망각한 존재들처럼 답답하게 행동하고 있다.  

    우리는 까먹고 또 까먹는다. 그토록 참담한 일을 당하고서도 왜 우리는 그 끔찍한 경험을 쉬이 잊어버리는 것일까?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하지 않고, 조심하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이는 한국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망각은 인간의 생존 비결이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

    망각은 인류가 생존을 위해 진화시켜온 선택과 적응이었다. 이 세상 누구라도 계속 생존하기 위해서는 지난 힘든 일, 어려운 일을 어느 정도 잊어야 한다. 고통스럽고 힘든 기억을 망각 없이 모두 간직한 채, 잊지 못한 채, 혹은 그 기억을 계속 떠올리며 살아가는 일은 생각만 해도 고통스럽고 끔찍하다.

    유독 고통스럽고 끔찍한 일들이 많았던 우리 역사는 우리 망각 뇌가 더할 나위 없이 활성화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계속 전진하기 위해 우리는 어제를 까마득히 잊는 마음의 최면제를 쉬지 않고 복용해왔던 것이다.

    상담에서 접한, 망각에 관한 인상적인 사례가 있다. 예전 상담했던 한 여성은 자신이 성폭행 당한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사건 당시가 인지능력이 어느 정도 완성된 십대 후반이었음에도 그 일을 떠올리기가 힘들다고 했다. 날짜, 장소, 가해자, 그 후 행적 등. 자신이 성폭행을 당한 건 분명하나 나머지 일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상담 당시 그녀는 심한 불안장애를 겪고 있었다. 혼자 있을 때 자신의 집마저 공포스러웠다. 여러 번 그 아픈 기억을 재구성하고 어루만져주고 나서야 그녀는 당시의 기억을 조금씩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기억이 점점 또렷해지고, 일순간 기억의 파편들이 쏟아지자 그녀는 다시 한 번 극심한 공포와 불안, 슬픔에서 한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공포가 심해지던 즈음에는 일주일에 3번 가까이 상담을 했고, 매 번 두 시간 가까이 안정을 되찾기 위해 대화를 나누었다. 나와 공포의 기억을 다시 적고, 자신의 의식을 다치지 않는 방향으로 분해해 정리하는 연습을 반복하고 나서야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글쓰기치료와 병행된 스토리텔링 치료가 차츰 그녀에게도 과거에 대한 구속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티모시 월슨의《스토리》에서 스토리텔링 치료의 대략적 방법론을 확인할 수 있다).

    몇 달이 지나고 조금 안정을 얻은 그녀에게 왜 고통스러운 사건을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는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인간 누구나 불쾌하고 불편한 기억을 계속 떠올리면서 살 수는 없다. 우리 뇌 안에는 불안하거나 쾌적하지 못한 기억을 망각하도록 돕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심리학자 탈리 샤롯은《설계된 망각》에서 인간은 미래를 최대한 낙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때로는 합리적 사고를 제대로 할 수 없도록 진화해왔다고 설명한다. 인간에게는 미래를 떠올릴 때,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위험요소나 부정적 측면을 간과하는, 편향적 사고를 하는 인지적 경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자신의 긍정적 전망을 흐리게 할 만한, 걱정과 불안을 일으키는 기억이나 위험요인들에 대해서는 뇌 스스로 알아서 제거하거나 소멸시키는 뇌 회로 역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 모두가 앓는 집단적 안전불감증은 무척이나 불편한 기억을 잊으려고 애쓰는, 우리의 집단무의식이 벌이는 무한한 망각작용의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연일 쏟아지는 숱한 부정적 사건사고에 시달려야 했던 우리는 좀 더 강력한 망각능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안전불감증은 단지 집단무의식의 구조화된 심리적 기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와 문화가 키워온 비도덕성이나 비합리성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안전불감’이란 단어는 아무 때나 등장하는 말이 아니다. 큰 사건이 터지고, 많은 사람이 다치고 목숨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포커스가 맞춰지는 한국인의 독특한 심리구조이다. 누군가의, 한 무리 집단의 큰 희생이 뒤따른 뒤에야 한 번 더 떠올려지는 한국인의 심리코드인 셈이다. 비유하자면 안전불감은 대형사고의 기생충, 개를 죽이는 심장사상충이다. 

    안전불감증이 생기는 정신적 원인은 다양하다. 무사안일주의나 껍데기만 번지르르하면 된다는 속물근성, 내실보다는 속도만 중시하는 빨리빨리 성향 등이 모두 한국인의 안전불감증을 키워내는 정신의 독버섯들이다. 이는 사회 전체를 깊은 슬픔에 빠지게 만드는 대형참사나 아까운 인명피해를 불러일으키게 이끄는, 우리가 차차 반드시 도려내야할 심리구조일 것이다.

    파시즘의 공포와 만행, 몰락을 전면에서 경험한 독일인들은 분명 떠올리기 싫은 역사이자 수치스러운 기억이지만, 나치의 잔혹한 범죄들을 회상하고, 학습할 수 있는 수많은 기념물과 전시관, 박물관을 전국의 도시 곳곳에 만들어놓았다(이와 반대로 일본사회가 여전히 파시즘의 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의 파시즘적 기억을 체계적으로 사회에서 지워내고 망각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는 자신들이 비인간적인 참상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양심적 결단이자 지혜로운 선택이다. 이를 반면교사 삼아 우리 역시 사회 곳곳에 아픈 기억의 버튼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그 기억이 아프면 아플수록 더 첨예한 기록물을 남기고 기념비를 세워야 할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