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상의 입시 속 의미 찾기] 사회학의 쓸모에 대해 신진상이 묻고 바우만이 답하다
조선에듀
기사입력 2017.02.13 09:25
  • 안녕하세요. 신진상입니다. 오늘은 지난 달 91세의 니이로 타계한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에 관한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사회학과 철학과 지망생들과 함께 가장 많이 읽고 서평 수업을 한 사회학자가 바로 바우만이었습니다. 서울대 지원자들의 자소서와 학생부에도 가장 많이 발견되는 사회학자입니다. 리퀴드 러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액체 근대 등등 특히 ‘사회학의 쓸모’(서해문집)는 사회학이 어떤 학문인지에 대해서 쉽게 쓴 책이어서 사회학과 뿐 아니라 사회과학대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도 권했던 책이지요. 오늘은 이 책의 서평을 독특한 방식, 인터뷰의 형식을 빌려 소개해고자 합니다. 책 내용을 바탕으로 제가 질문과 답변을 구성해 보았습니다. 다음은 가상으로 진행된 인터뷰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영면을 바랍니다.

    문 : 안녕하세요, 사회학은 어떤 학문인지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정의에 대해서 들려주시지요.
    답 : 사회학은 인간 경험과의 대화라고 정의를 내리고 싶습니다. 경험은 경험과 체험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경험은 우리가 세계와 교류하면서 나에게 생기는 일을 의미합니다. 체험은 우리가 세계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살면서 내가 겪는 일을 의미합니다. 경험이 체험보다 보다 더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회학은 인간 대화에 참여하는 것인데 그중에서 경험에 관한 대화에 좀 더 빈번하게 개입한다고 할 수 있죠. 체험에 관한 대화는 아무래도 문학의 영역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문 : 사회학은 필연적으로 그 사회의 정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사회학과 정치에 관한 교수님의 견해를 들려주시지요.
    답 : 좋든 싫든 의도했든 아니든, 사회학은 정치에 깊숙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해관계의 갈등과 적대적인 정치로 가득 찬 갈등사회입니다. 불가피하게 정치적일 수밖에 없지요. 사회학은 권위와의 관계를 끊을 수도 정당화할 수도 있고 제도화된 정치에 대한 대안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사회학은 예전 청치학에서 다루던 수많은 기능을 물려 받아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중입니다.

    문 : 교수님의 저서를 보면 문학에 대한 언급이 많은데요, 문학을 그렇게 텍스트로 자주 언급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 : 아카데미의 제도적 경계의 안정성과 시장 자체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면서 ‘간학문성’이 아카데미 장벽 내에서 점차 유행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소설 등의 문학이 사회학을 풍부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지요. 저는 사회학과 문학의 연관성을 이야기할 때 밀란 쿤데라를 많이 언급합니다. 그는 ‘커튼’에서 ‘예단’이라는 커튼을 찌는 행위가 현대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커튼에 구멍 내기는 쿤데라 소설의 핵심 개념으로 사회학적 소명을 수행하는 데 아주 적절한 비유로 쓰일 수 있습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를 면밀히 조사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어둠으로부터 퍼 올리는 것, 그리하여 인간의 자유를 확장하는 일이 사회학의 역할인데 그런 역할들을 많은 소설가들이 문학 작품 속에서 해온 것이 사실이죠. 사회학적 상상력이 사회학에서도 아주 중요한데 그 상상력의 원천은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서 소설을 쓰는 것과 사회학적 글쓰기가 조금 다를 뿐이지요. (바우만은 이 책 뿐 아니라 다른 책에서도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독일의 영화감독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를 자주 인용합니다. 그래서 읽기가 쉬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문 : 사회학자라는 직업 지난 세월 동안 오직 이 한 가지 직업만 갖고 살아오셨는데 사회학자라는 직업 다시 태어나도 선택하시겠습니까?
    답 : 네 그렇게 할 겁니다. 전쟁(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지치고 황폐한 조국(폴란드)으로 돌아왔을 때, 우주의 신비를 향하던 젊은 시절의 열정을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참한 리얼리티로 이동시키리라 결심했습니다. 그 후 저에게 사회학하기는 일종의 습관처럼 변했지요. 제가 사회학을 시작한 동기는 시사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나 자신에게도 왜 사회학이 내게 그토록 소중한지를 확실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을 배우지 못했으며, 사회학은 내 삶과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싶군요.

    문 : 자본과 노동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기실 사회학이 아닌 경제학의 영역이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요. 사회학,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회학에서는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직접 듣고 싶습니다.
    답 : 산업 사회의 상대적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도 마르크스가 예언했던 상황과는 많이 다르게 변화했습니다. 레닌은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야망과 충동에만 맡겨 둔디면 기껏해야 ‘노동조합 의식’만이 발달할 것이라고 불평을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노동자들의 자본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이 사라진 거죠. 자본주의는 수많은 문제를 여전히 갖고 있는데 기만적인 총체성이 노동자들의 허위의식을 은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고무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의 역사적 운명과 그에 따른 윤리적 정치적 책임은 절정에 오르게 됩니다. 해방이란 과업과 희망이 모비 딕에서 에이해브 선장의 신호를 따르는 선원들처럼 역사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야 할까요? 이때 우리는 아도르노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 해방이란 전망이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에 비해 형편없이 위축되어 버렸지만 사회적 악이 유해하게 지속되고 있기에 더욱 열심히 변혁을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여기의 이 세계와 다른 ‘해방된’ 세계(인간다움을 받아주는 사용자 친화적인 사회), 그 새로운 길을 찾는 일은 바로 사회학자들의 몫입니다. 실패는 일시적이지만 희망은 지속적입니다. 가능성은 파괴될 수 없으며 가능성의 실현을 방해하는 역경은 단단하지 않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사회학의 목표입니다.

    문 : 교수님은 은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유동하는 현대 등 숱한 은유를 책 속에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에서 은유의 중요성이라고나 할까? 은유에 많이 의존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 : 은유는 특정한 학파나, 특별히 문학을 편애하는 사람들만이 의존하는 수단이나 전략이 아닙니다. 은유는 사유의 과정에서 연쇄적으로 진행되는 생각과 순간을 서로 연결해주는 수단입니다. 우리가 낯선 경험과 마주했을 때, 그것을 포착하고 탐색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개념의 연결망이 필요합니다. 이때 은유는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상상력과 이해력을 제공하는 것이죠. 은유는 우리들이 만나는 수많은 개별자들로부터 보편적 특징을 보다 쉽게 간파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사회학은 삶이라는 드라마의 배우에게 말을 거는 작업입니다. 사람들의 삶과 경험과 전략을 해석하는 데,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선택을 돕는 데 은유는 아주 매력적인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은유는 물론 포괄적이고 최종적이지 못하다는 한계를 분명 갖고 있지만 새로운 전망을 여는 데 결정적인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즐겨 사용하는 유동성이라는 은유를 통해 저는 우리 삶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물려 받은 오래된 삶의 방식이 더 이상 오늘날의 인간 조건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새로운 조건에 적합한 새로운 방법과 삶의 양식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글로벌 글로벌하지만 우리의 목적지가 어딘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이미지를 아직 갖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을 표현하는 데 유동성이라는 은유가 아주 적절했던 것이지요. 

    문 : TV 인터넷 영화 SMS 등 사회의 텍스트들은 갈수록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시각 언어 범람의 이 시대에 사회학은 여전히 문자의 언어에 머물러야만 할까요?
    답 : 그렇습니다. 젊은 세대는 문자가 아니라 이미지로 채워진 세계 속에서 성장했지요. 사회학은 해석학적 임무 때문에, 다른 모든 해석학과 마찬가지로 문자와 연관된 채 머물러 있습니다. 이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리히덴베르크의 지적 대로 “이미지가 인간의 세계에서 홍수를 이루기 시작해 인간의 언어 능력이 익사 상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오늘날의 유동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회학은 초창기 사회학과 전혀 다른 풍경 속에 처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죠. 저는 오히려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이 자유의 과학이자 테크놀러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사회학은 노력해야 합니다. 인터넷 SNS 페이스북 등을 통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군중이 사회학 앞에 펼쳐질 수 있습니다. 동시에 사회학의 도움을 요청하는, 전례 없는 공중의 수요도 펼쳐질 것입니다.

    문 : 교수님은 저자로서 수많은 독자들을 만납니다. 독자들로부터 저자가 배우는 것도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독자와 사회학자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답 : 저자가 텍스트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도 없고 통제되지도 않는 운명에게 텍스트를 넘겨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메시지는 한 번 발송되고 나면 자신만의 자립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만약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논쟁이 발생하면, 저자의 해석이 수용자의 독해보다 우월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보통 독자의 다양한 경험에 의해 형성된 인식론적 틀과 텍스트 사이의 상화작용에 따라 의미가 떠오르기 때문이죠. 의미는 전적으로 독자들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저자인 저는 독자들에게 제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표현 능력을 열심히 연마하여 모호함을 최소치까지 줄이려고 노력을 하는 중입니다.

    문 :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사회학의 쓸모는 무엇입니까?
    답 : 사회학은 사람들이 삶에서 겪는 고유한 문제로 인한 경험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람들의 분투에 사회학이 얼마나 적절하게 연관되어 있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야말로 사회학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진정한 수용자입니다. 사회학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중요성, 그리고 사회학의 쓸모와 유익함을 발견하는 게 바로 이들이니까요. 그러므로 평범한 일상적 경험과의 연관성은 오늘날 사회학이 ‘공공 영역’에 접속될 수 있는 유일한 연결고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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