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상의 입시 속 의미 찾기] 드라마 W 속 학생부 종합 키워드 찾기
조선에듀
기사입력 2016.08.16 09:51
  • MBC 제공
    ▲ MBC 제공
    안녕하세요, 신진상입니다. 요즘 MBC에서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마다 방영되는 드라마 W(더블유) 많이들 보고 계시죠? 저도 드라마 W(정대윤 연출 송재정 극본)를 빠지지 않고 보는 팬입니다. 제가 시작부터 몰입해서 보는 국내 드라마가 흔치 않았는데요 이 드라마는 1회부터 몰입하게 되더군요. 볼 때마다 한국 드라마가 많이 발전했구나, 예전에는 한국 드라마에서 배우의 연기만 보였는데 이제는 배우와 연출을 압도하는 스토리 바로 작가의 힘 같은 게 느껴져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입시를 앞두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단순한 재미 뿐 아니라 교육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학종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이 드라마는 경험다양성과 문화친화성 그리고 전공적합성까지 실로 건질 게 많습니다. W라는 제목이 극중에서는 주인공 강철이 자신의 가족을 죽인 범인이 누구(Who)인지, 왜(Why) 죽였는지를 알고 싶어 만든 수사 전문 방송국 이름이잖아요? 그런데 학생부 종합이야말로 W입니다. 자소서 생기부를 통해 그 학생이 누구인지, 왜 이런 활동을 했는지를 찾아가는 게 학종의 본질 아니겠습니까? 이 드라마를 1회부터 보면서 많은 영화 소설 시 등의 텍스트와 학생들이 생각할 만한 주제들이 제 머리 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이런 영화 소설 시 등을 정말 읽었을까 라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동시에 드는 순간이었죠.   

    W와 가장 많이 닮은 작품은 영화 매트릭스였어요. 강철(이종석 분)과 오연주(한효주 분)의 러브 라인은 트리니티와 네오의 러브 라인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것 있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진짜 현실인지 아닌지 강철이 오연주에게 묻는 장면에서 매트릭스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학이 있는 드라마라는 소리죠. 그리고 5회에서 원작자와 강철이 만나 대화하는 장면은 영화 3편에서 네오가 매트릭스 설계자(인간의 모습을 한 컴퓨터)를 만나 대화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자유의지에 관한 네오와 설계자와의 유명한 대화는 “너는 내게 총을 쓸 수 없다, 왜냐 그게 네 설정값”이라는 원작자와 강철의 대화와 고스란히 포개집니다. 모든 것, 심지어 네오의 등장과 그에 따른 매트릭스의 파괴까지도 매트릭스가 설계한 것이라는 영화 속 주장과 일맥상통하죠. “자유의지는 없다.” 저라면 이 드라마를 보고 철학자 대니엘 데닛의 ‘자유는 진화한다’를 찾아 읽은 뒤 자유의지와 결정론 사이의 길고도 긴 논쟁에 대해서 정리해 보며 자신의 입장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질 것 같습니다. 참고로 데닛은 결정론의 입장에서 자유의지의 여지를 인정하는 약한 결정론자입니다.    

  • 네이버 제공
    ▲ 네이버 제공

    작품 속으로 주인공이 들어가는 장면은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사진)’, 존 맥티어넌 감독의 ‘라스트 액선 히어로’ 등이 떠올랐어요. 특히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는 슬픔과 서정성은 ‘카이로의 붉은 장미’와 아주 유사합니다. 대공황 시대, 영화 외에는 현실을 잊을 수 없었던 시절, 한 영화를 수십 번 반복해서 보며 현실 도피를 해야 했던 슬픈 여 주인공 미아 패로(우디 앨런 감독의 부인이기도 했죠)가 주인공입니다. 같은 자리에서 수십 번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여자 관객에게 어느 날 스크린 속 남자 주인공이 묻습니다. “도대체, 이 영화 어디가 좋아서 매일 똑 같은 자리에서 이 영화를 계속 보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남자 주인공의 돌출 행동에 놀란 다른 배우들이 맞장구를 칩니다. 자신들은 맨날 똑 같은 연기에 지쳐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며 이 관객에게 강한 호기심을 드러냅니다. 이 여자는 현실에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평범한 여성이었는데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일종의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시나리오 대로 연기하지 않고 관객을 영화 속으로 납치해 그녀에게 영화 속 세계를 보여줍니다. 관객이 영화 속으로 들어가고 영화 주인공이 스크린 바깥으로 나오면서 세상은 난장판으로 변합니다.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로맨스가 펼쳐질 것 같았는데 결국 영화 주인공은 영화 속으로 현실의 관객은 현실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엔딩은 참으로 슬픕니다. 극장에서 쫓겨난 여주인공은 극심한 상실감과 공허감 끝에 다른 영화관에 들어가게 되지요, 방금 전까지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던 여주인공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서히 그 영화에 몰입(정확히는 영화 속 새로운 남자 주인공)하게 되지요. 새로운 환상에 빠져드는 그녀의 눈빛을 클로즈 업하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학생들에게는 할리우드가 꿈의 공장이라고 불리는 이유, 영화 드라마 등의 대중문화가 대중들의 저항의식과 비판의식을 잃게 만든다는 비판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겠지요. 드라마 W의 결말까지 가봐야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겠지요.   

    주인공이 자신이 소설 속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알아가는 점에서는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소설 속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어딘가에서 소설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W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제목이 ‘소설보다 더 이상한’이 되는 거겠죠. 영화에서도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창조주(소설가)를 만나지만 강철처럼 그를 죽이려는 시도는 못합니다. 서로 화해하게 되는 결말이 다릅니다. 물론 W에서도 원작자와 캐릭터 간의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6회에서는 소설이든 만화든 영화든 엔딩 이후에 무엇이 전개될지 궁금해 하는 오연주의 대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대부분의 동화는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라는 문장 하나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차단합니다. 물론 모든 작품이 그런 것은 아니고 해피 엔딩의 작품 속에서만 가능하죠. 관객이나 독자가 주인공에 몰입되면 될수록 그들은 해피 엔딩을 원하기 때문에, 즉 주인공의 불행한 결말을 원하지 않기에, 사실 작가 입장에서는 그 것 외에 대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오연주의 입을 통해 이 작품이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라는 멜로 드라마의 공식을 뒤엎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제게 심어주더군요. 이 드라마는 설정은 비현실적이면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묘사는 놀라우리만치 현실적이거든요. 현실은 해피 엔딩보다 새드 엔딩이 훨씬 더 많은 법이니까요.

    엔딩 이후의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과 과연 그들은 그후에 행복했을까? 라는 의심…. 저는 이 장면에서 최인훈씨의 소설 ‘춘향전’이 생각났습니다. 관념 소설의 대가죠.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광장’의 작가입니다. 이 작품은 초반에는 우리가 아는 춘향전의 스토리 라인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어디서부터 달라지느냐 하면 춘향이가 암행어사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달라집니다. 꿈에도 그리던 이몽룡이 아니었습니다. 작가는 이 장면에서 주관적 논평으로 개입을 합니다. 요즘도 공부 잘 하던 학생들이 집안이 망하면서 충격을 받아 공부에 집중을 못 하게 되고 그 결과 서울대 갈 아이들이 인서울 하기도 힘들어지는 게 현실이잖아요? 하물며 집안이 풍비박산난 상태에서 사교육 도움 없이 독학으로 공부해 국가 고시 수석을 차지한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독자들에게 묻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설 속 이야기지, 현실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춘향이는 몰락한 양반 자제 이몽룡과 당시는 사랑하는 사이였고 서로 얼굴만 봐도 좋았던 시절이었기에 두 사람은 세상 모두로부터 벗어나 오직 둘만 있을 수 있는 공간, 산 속으로 도피하면서 원작과는 다른 새로운 결말을 맞습니다. 이 소설의 에필로그는 무시무시합니다. 춘향이와 이몽룡이 더 이상 실명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산 속에서 길을 잃은 한 선비가 헤매다 어느 인가에서 민박, 하룻밤을 묵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곳에서는 자식 없이 사는 부부(춘향이와 몽룡이로 추정되는)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부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느낀 그 사람은 어떻게 하다 두 사람의 부부 싸움 장면을 듣게 되고 무서움을 느껴 서둘러 그 집을 떠나게 됩니다. 이몽룡과 성춘향 사이에는 사랑과 설렘은 사라지고 권태와 무관심이, 신뢰는 사라지고 의심과 그에 따른 증오심이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었죠. 춘향전이 현대에 부활한다면 가장 어울리는 결말이 아니겠습니까? 

    뒷 이야기의 매력. 지난 해 제가 본 서울대 합격생의 자소서 중 가장 멋진 자소서는 러시아의 대문호 고골의 ‘죽은 혼’의 뒷 이야기를 꾸며보면서 러시아 농노제에 대해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한 대작가를 비판하는 글이었습니다. 이런 비판 의식은 저자의 생각에 대한 추종, 그리고 엔딩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끝내는 게 아니라 엔딩부터 새롭게 생각을 시작하는 습관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개인적으로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4회 엔딩 부분이었습니다. 자기가 작품 속 주인공이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는 허구의 세계라는 걸 강철이 안 순간 갑자기 세상이 멈추어 버리는 장면입니다. 저는 이 때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영화 ‘더 데이 디 어스 스투드 스틸(지구가 멈추어 버린 날)’이 떠올랐답니다. 

    그와 동시에 초등학교 6학년 때 읽었던 SF 소설 중에 이런 이야기가 기억났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W 4회처럼 갑자기 시간이 정지됩니다. 오직 주인공만이 움직이고 모든 것이 멈추어 버렸습니다. 주인공은 드라마 속 강철처럼 극단적 고립감과 공포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외계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앞으로 60분 뒤에 지구는 멸망한다. 너에게 시계를 주겠다. 이 시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첫 번째 방식은 지구 시간 그대로 진행이 된다. 즉 60분 동안 시간은 흘러가고 너는 60억 명의 다른 인류와 함께 최후를 맞으면 된다. 두 번째 방식은 60분의 시간을 최대한 지연시켜 60년 동안 시간이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너는 너의 자연적 수명을 유지한 채, 즉 충분히 산 채(대신 홀로 늙어가며) 지구의 종말 이전에 자연사할 수 있다. 선택은 너에게 달려 있다. 너는 홀로 외로이 살다가 홀로 죽음을 맞을 수도 있고 아니면 모든 사람과 함께 주어진 60분의 시간을 보내고 같이 최후를 맞을 수도 있다. 소설은 주인공이 결국 선택을 하지 못한 채 끝났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당시 어린 저는 사람들 대부분이 홀로 60년을 사는 쪽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아마 대부분 60분 뒤에 같이 죽는 쪽을 택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 있죠. 여러분들은 어떤 선택을 하실 건지 궁금하네요. 이런 식의 사고 실험은 의대 MMI면접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특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선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선택의 이유가 중요한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제가 학생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방영된 작품 전체를 통해 하나의 키워드를 골라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주인공’입니다. 오연주가 드라마 속에서 가장 많이 자주 하는 발언은 이겁니다. 남발 수준입니다. “주인공이니까” 맞습니다. 소설과 영화 만화 등 대중 문화 속 텍스트는 주인공이 텍스트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텍스트가 주인공을 위해 존재합니다. 시간도 주인공을 위해서 흘러갈 정도입니다. 오연주의 현실 세계의 시간은 정상적으로 흘러가지만 만화 속 시간은 주인공의 입장에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즉 강철과 오연주가 함께 하는 시간은 실제 시간처럼 흘러가지만 강철과 오연주가 함께 하지 않는 시간은 두 달이 30분 정도로 압축과 생략이 발생하는 거죠.

    학생들은 이 장면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대중들은 주인공에 열광하는 걸까? 그 이유는 대중들은 결코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 싶지만 어느 누구도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게 현실이죠. 독일의 희곡작가이며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런 역설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브레히트의 시 ‘독서하는 노동자의 질문’

    성문이 일곱 개인 테베를 누가 건설 했던가?
    책에는 왕들의 이름만 적혀 있다.
    왕들이 손수 바윗덩어리들을 끌고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된 바빌론
    그 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일으켜 세웠던가? 건축 노동자들은
    황금빛 찬란한 도시 리마의 어떤 집에서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완공된 날 밤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에는
    개선문이 많기도 하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개선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적인 아틀란티스에서도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린 날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들이 그들의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시저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데려가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왕은 자신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말고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말고도
    또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승리가 하나씩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십 년마다 한 명씩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그 비용은 누가 지불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 Chris Harman의『민중의 세계사』첫머리에

    그러고보니 대중 문화 작품 뿐 아니라 우리가 배우는 역사도 주인공의 것, 모든 것을 용서받은 승자의 기록인 셈이네요. 역사학과 지망생이라면, 주인공만의 역사가 갖는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비판적 입장에서 글을 써보면 어떨까요?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에듀포스트에 실린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