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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진상입니다. 소설가 복거일씨는 ‘단문의 시대를 위한 자유주의 독법’이란 글에서 “글들이 점점 짧아진다. 글들이 그렇게 짧아진 데엔 시간의 가치가 부쩍 커졌다는 근본적 요인이 존재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일은 일대로 있죠, 휴대폰이다 게임이다 SNS다 영화다 현대인들은 여가 시간에 대안이 많습니다. 굳이 책 그것도 분량이 두꺼운 책을 읽어야 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부족한 게 현실이지요.
현장에서 학생들의 생기부를 보면 그분의 말이 실감이 납니다. 요즘 생기부에서 발견할 수 없는 책이 태백산맥입니다. 10권짜리 책이죠. 학생들은 도대체 그 긴 책을 어떻게 읽냐는 반응입니다. 서양 작가 중에서는, 40대~50대에게는 친근한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도 요즘 학생들이 잘 읽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 길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게 학생들의 솔직한 답변입니다. 장편소설이 대하 소설, 중편 소설이 장편 소설, 엽편 소설이 단편 소설처럼 오인되는 시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학생들에게 도스토옙스키를 권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워낙 좋아하는 작가인데다, 투자되는 시간 이상으로 얻어가는 게 많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지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죄와 벌은 물론, 가난한 사람들, 지하로부터의 수기, 백야 같은 작품들까지 ‘노름꾼’을 제외한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책들이 저의 추천 도서이자 개인적으로 아끼는 작품들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순위를 매겨보자면 1. 가난한 사람들 2. 백야 3. 죄와 벌 4. 지하로부터의 수기 5. 백치입니다. 제가 도스토옙스키를 읽지 않았다면 저는 무엇이(어떤 인간이 아니라) 되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도스토옙스키를 어떻게 읽고 자소서 학생부 등에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요? 서울대 지원자의 자소서를 사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사례 1)
제 말투를 어떻게 고쳐야할지 몰랐습니다. 그 고민에 답해준 것은 ‘독서능력경진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읽은 ‘죄와 벌’입니다. 소냐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고 말하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등 커뮤니케이션의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주었습니다. 공황장애를 앓던 로지온마저 말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경청이 마음을 얻는 지혜라는 것을 깨닫고 반성했습니다.
사례 2)
이 작품 이전에 『죄와 벌』을 읽었던 데다 (중략) 이 작품은 ‘신은 존재하는가?’ 그리고 '선한 것은 무엇이고 악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가장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중략)그렇기에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힘겨운 부분도 많았지만…
사례 3)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삶이 매우 기구했고 그의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이 죄와 벌이라는 작품 속 카트리나의 신경질적인 성격에 녹아들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습니다. (중략)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원서로 읽어서 심리묘사를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습니다.
첫 번째 사례와 두 번째 학생은 일반고와 자사고로 학교 유형이 다릅니다. 일반고 학생은 학교 대회 준비 차 ‘죄와 벌’을 읽었고 자사고 학생은 개인적 관심의 연장선 상에서 ‘카라마조 프의 형제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게 된 계기가 달라서인지 책에서 이끌어 낸 것도 다릅니다. 앞에 학생은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스킬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음을, 후자의 학생은 신의 존재, 선과 악 등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 없는 고민의 시간을 가졌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일종의 신앙서 철학서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물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무겁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이유는 없지요. 첫 번째 학생도 자신의 맥락에 맞게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고 할 수 있겠죠. 제가 예전에도 썼지만 모든 책은 자기계발서고 특히 성장기 청소년 시기에는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도스토옙스키 읽기에 정답은 없는 것이지요. 책을 읽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고 자신을 변화(그 방향이 긍정적)시켰다는 점에서 교수님들은 첫 번째 자소서가 두 번째 자소서보다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자소서는 조금 상황이 다릅니다. 바로 서울대 로어로문학과 지원자이기 때문이지요. 도스토옙스키를 도스토옙스키로 읽어야 할 이유가 있겠죠. 그래서 이 학생은 원서로 읽고 심리 묘사를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고 쓴 것입니다. 그리고 두 학생과 달리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을 활용해 좀 더 깊이 있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도의 전략적인 접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 학생 모두 나름대로 ‘텍스트의 자기회’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텍스트의 자기화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유대인들을 꼽고 싶습니다. 미국 최고의 에세이 작가 수전 손택의 유고집 ‘문학은 자유다’를 보면 도스토옙스키는 유대인들을 혐오했다고 하는군요. 손택 역시 유대인입니다. 심지어 민족이라는 표현도 쓰지 않고 부족이라고 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코프가 “난 당신에게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니오. 난 모든 인류의 고통에 대해서 무릎을 꿇었던 거요.”라고 했던 것을 보면 도스토옙스키는 분명 박애주의자 코스모폴리탄이어야 맞는데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대표적으로 우디 앨런 감독이 있죠)들은 그에게 특히 끌리는 이유에 대해서 손택은 멋진 해석을 시도합니다. 구 소련의 의사 출신 유대인 작가로 도스토옙스키 부부를 주인공으로 한 ‘바덴바덴에서 보낸 여름’을 쓴 레오니트 칩킨이란 작가의 말을 인용합니다. 칩킨은 도스토옙스키 문학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광을 “러시아 문학의 위대성에 바친 유대인들의 열정”이라고 했습니다. 덧붙여 손택은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한다는 것은 문학을 사랑한다는 것이었다고 평가를 내리더군요. 결국 유대인들은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의 보편성을 드러내기 위해 도스토프옙스키를 좋게 말하면 선용했던 것이지요. 도스토옙스키가 위대한 작가이기는 해도 자신들을 혐오하는 도스토옙스키를 사랑하는 유대인들이 더 위대해지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의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놀라운 텍스트의 자기화의 사례 아니겠습니까? -
※에듀포스트에 실린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신진상의 입시 속 의미 찾기] 요즘 학생들은 도스토옙스키를 어떻게 읽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