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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폭탄 선언을 했습니다. 올해 수능을 역대 수능 중에서 가장 쉽게 출제, 구체적으로 만점자를 각 영역별로 1%씩 양산되도록 하겠다는군요. 언수외 만점자가 영역별로 7천명이면 세 과목 모두 만점자도 1500에서 2000명 선일 겁니다.
문과의 경우 연대 경영이나 서울대 경영 1단계 통과는 언수외 뿐 아니라 탐구 영역까지 만점에서 결정되겠지요. 실수 하나로 갈 수 있는 대학이 스카이에서 그 이하의 대학들로 급전직하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수능을 운전면허 시험처럼 자격 시험화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밝힌 거죠. 지난해는 쉽게 낸다고 해놓고 어렵게 냈지만 올해는 정말 쉽게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내년에 선거가 있기 때문이지요.
국민이 사교육에 대한 감정은 양가적입니다. 국민으로서는 사교육을 욕하면서 자신의 자녀는 사교육 혜택을 받아 명문대에 합격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죠. 하지만 사교육비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점에는 거의 대부분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공약으로 집권한 현 정부는 사교육비에 특히 민감할 수밖에 없지요. 실제 특목고 입시 규제, 입학사정관제 전형의 확대 등으로 사교육비가 어느 정도 줄어든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입학사정관제 확대에 현 정부가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이유도 이 제도가 지금까지 나온 시험 위주의 그 어떤 제도보다 사교육 유발 효과가 가장 적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학원들이 입학사정관제 상품을 만들기는 쉽지 않죠.
정부가 이렇게 수능을 쉽게 내겠다면 대학은 결국 변별력을 이유로 대학별 고사로 학생들을 뽑을 수밖에 없는데 대학별 고사 그 중에서 논술의 팽창은 정부가 결사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대신 면접에는 관대합니다.
논술은 안 되고 구술 심층면접은 된다는 논리인데 구술 심층면접은 서울대를 예를 들면 경영대의 경우 영어로 왜 경영학과에 가고자 하는지 자기 소개를 해보라든지 아니면 미적분 등의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게 합니다. 사실상 심층 면접은 노골적인 본고사로 변질될 가능성이 충분하죠, 수능도 무력화시키고 힘으로 논술을 페지한다고 해서 시험으로 인한 사교육이 근절되는 것은 아니고 심층면접이라는 더욱 무시무시한 괴물이 탄생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죠.
정부의 바람이 사교육비 전체 볼륨을 줄이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수능의 변별력을 줄이는 정책은 옳은 방향이라는 생각입니다. 그와 동시에 대학별 고사 중에서 논술을 잡으려고 하면 상위권 대학들은 지식을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 있는 심층 면접에 더더욱 매력을 느낄 겁니다. 영수 중심의 기존 대형 학원들은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릴지 모르고요. 논술의 사교육 유발 효과가 크다고 해도 영수만큼은 아니겠지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정부가 논술을 정말 폐지할 생각이라면 수능을 쉽게 출제해서는 안 되겠죠. 수능을 쉽게 내면서 논술도 잡는다는 것은 실효성이 없고 모순적인 정책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이 바보가 아닌 이상 우수 인재를 가려서 뽑고 싶은데 수능이 그 기능을 못한다면 당연히 논술을 강화하겠죠. 기본적으로 대학들은 내신으로 뽑는 걸 가장 싫어하고 내신보다는 비교과, 비교과보다는 논술, 논술보다는 수능을 선호했던 것이 최근까지의 추세였습니다. 그런데 수능을 쉽게 내면서 변별력을 없앤다면 수능과 논술의 순위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논술의 필요성은 느끼지만 현실적으로 수요로 연결되지 않았던 이유는 학생들이 내신과 수능 준비, 특히 수능 때문에 현실적으로 시간을 못 낸다는 것인데 내신과 수능의 부담이 줄어든다면 당연히 논술 준비를 하겠죠. 정부는 논술을 죽이고 입학사정관제로 대학들이 우수 학생을 뽑기를 바라는데 그러면서 또 입학사정관제에서 사교육 유발효과가 큰 스펙, 영어 인증, 경시 대회 성적 등은 반영하지 못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학들은 상위권 대학일수록 시험 등 경쟁을 통해 획득한 비교과를 선호합니다. 그런 비교과를 반영하지 말고 순수하게 학교 생활만 보고 잠재력을 평가하라는 게 정부의 요구인데 국내 공교육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대학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렇게 학생들을 뽑으려고 하지 않겠지요. 입학사정관제는 취지와 명분은 분명 좋은데 이해 당사자가 동상이몽을 꾸고 있어서 쉽게 착근하기 어렵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떤 제도든 대한민국에 도입되는 순간 한국형으로 이상하게 변질되는 특징이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무리하게 논술 폐지를 강행할 경우 많은 학생들의 피해가 예상됩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일까요?
논술 학원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더 큽니다. 학생 중에서 중상위권 학생들입니다. 이 학생들은 열심히 노력하면 수능 2등급 두 개는 받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렵지요. 이 학생들이 서울에 있는 괜찮은 4년제 대학을 가려면 결국 정시가 아닌 수시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올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논술을 폐지한다는 것은 이들의 희망을 뭉개버려는 거죠. 최상위권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정시의 문이 줄어듦으로써 피해를 입지만 최상위권 학생보다는 중상위권 학생들이 월등히 많기 때문에 공리주의에 입각하면 논술을 유지해서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전체 사회의 복리를 높이는 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또 문과의 경우 여학생들의 피해가 예상됩니다. 여학생들은 대개 수리가 약하고 언어가 좋습니다. 문과 논술은 수리 논술을 보는 일부 학교를 제외하면 언어 특히 비문학과 가장 가깝죠. 수리는 안 되는데 언어 성적은 좋고 독해력만 확보해 놓았다면 논술에 조금 투자해서 이들은 수시로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습니다.
이들은 상경계보다 인문대나 사범대를 원하기 때문에 대학 공부를 고려하더라도 수리보다 언어나 언어 논술 공부에 더 투자하는 것이 맞지요. 획일적으로 논술을 폐지할 경우 문과 대학이나 사범대학을 꿈꾸는 많은 여학생들이 수리의 벽 때문에 정시에서는 자신의 꿈을 못 이룰 수 없습니다.
흔히 논술이 비판받는 이유가 특목고 학생이나 강남 학생을 위한 전형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이 경제적 여력이 있어 논술 사교육을 많이 받는 건 사실이지만 특목고 학생과 강남 학생만이 논술 전형에 합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논술은 사교육의 힘, 즉 강사의 역할보다는 본인의 노력, 평소 사고와 독서 습관 등이 합격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내신이나 수능처럼 안 되는 친구들을 주입식과 스파르타식으로 단기간에 성적을 끌어올려서 되게끔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논술 학원들은 될 애들 모아 약간의 스킬을 가르쳐서 되게 만드는 ‘땅 치고 헤엄 치는 장사’를 해온 셈입니다. 논술 사교육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지방 학생 중에서도 굉장히 사려가 깊고 다각도로 문제를 생각할 줄 아는 학생들은 빠른 시간 내에 알고리즘을 동원해 기계적으로 답을 찾아내는 수능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지만 충분히 시간을 주고 문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뒤 원인과 해결책 등을 쓰게 하는 논술 시험에서는 진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학생들이 잠재력이 있는 학생들이지요. 이런 학생들을 논술 시험을 통해 발굴해주지 못한다면 결국 사교육 혜택을 더 많이 받았고 고액 사교육으로 점수를 올린 수능 성적 우수자들이 상위권 대학에 보다 많이 진학할 겁니다. 부의 대물림으로 학벌의 대물림으로 이어지면서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겠지요. 논술 폐지로 사교육비가 일부 줄면 모두가 해피할 것 같지만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군요. 감사합니다.
[신진상의 고등 공부 이야기] 누구를 위하여 논술을 폐지하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