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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 그대 용감한 헥토르여! 내 죽음의 운명은 제우스신과 다른 신들께서 원하실 때면 언제고 받아들이겠노라.”
안녕하세요, 신진상입니다. 오늘은 서양 고전 중의 고전이자 죽음과 운명에 대한 영웅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이야기를 학생부 종합 전형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해 들려드리겠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똑똑한 사람을 흔히 아테네에 비유하기도 하고, 완벽한 인간에게도 발견되는 약점을 이야기할 때 ‘Achilles' Heel’도 관용적으로 자주 사용되지요. 일리아스는 서양사학과 미학과 종교학과 영어 영문을 비롯한 유럽 어문학과 지원자들에게는 전공적합성을 바로 증영할 수 있는 책입니다. 서양문화의 뿌리로서 그리스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리스 신화를 읽은 다음 일리아스와 그 속편인 오디세이아를 읽으면 서양 정신사의 원류까지 가는 긴 여정을 마치게 되는 셈입니다.
제가 서두에서 인용한 아킬레우스의 이 명 대사는 이 책의 핵심(에스프리)를 압축하고 있습니다. 죽음(운명)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영웅의 자세입니다.
400만 년 전 최초의 인류 탄생 이후 인류는 길어야 100년의 삶이 운명적으로 주어졌습니다.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에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인간은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겠지요. 영웅이란 인류에게 운명 지어진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되 가장 멋있게 죽을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골라 죽음과 삶을 한 편의 연속된 드라마로 승화시키는 존재를 말합니다.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은 그런 면에서 가장 영웅적입니다. 자신들의 조국과 최고의 영웅으로서의 명예를 놓고 두 영웅은 건곤일척의 대결을 펼칩니다. 작품 속 승자는 아킬레우스 패자는 헥토르로 갈렸지만 살아남은 자나 죽은 자나 당당한 영웅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승자와 패자가 따로 없는 ‘윈윈의 드라마’였습니다.
기원전 13세기경의 희랍(希臘)과 소아시아반도를 배경으로 쓰인 이 대서사시를 2016년 대한민국의 중고생들은 어떻게 읽고 어떤 독후활동을 해야 할까요? 키는 바로 전공적합성입니다.
대한민국의 입시는 학력고사와 수능을 거쳐 학생부 종합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2018학년도를 기준으로 10명 중 8명이 학종으로 스카이를 가는 시대입니다. 학생부 종합은 학생들의 학업 능력 전공적합성과 인성, 창의성, 발전 가능성 등을 학교생활기록부와 자기소개서를 중심으로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선발하는 제도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전공에 대한 준비와 성숙도를 보여주는 전공적합성입니다. 경영대 지원자와 의대 지원자가 같은 책을 읽더라도 얼마든지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전공적합성 때문입니다.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전공에 맞춰 책을 해석하고 배우고 느낀 점을 학교생활기록부에 이렇게 적어 달라고 담임 선생님에게 요청해 보면 어떨까요? 1일1독을 실현하는 독서 섭력충인 제가 도움을 드리지요. -
꿈이 CEO 경제학자 등인 문과 학생들은 이 책에서 선택과 대가(代價)라는 키워드를 찾아낼 수 있겠지요. 경제 경영학과는 합리적 선택과 효율성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일리아스에서는 국가 차원에서는 그리스와 트로이, 개인 차원에서는 아가멤논, 아킬레우스, 헥토르, 파리스, 헬레네 등의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헥토르는 고집이 세고, 아가멤논은 욕심이 많으며, 아킬레우스에게도 약점은 있습니다. 이들 영웅에게도 이처럼 인간적인 면모가 발견되기에 평범한 우리들이 읽으면서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겠지요. 때로는 그 인간적인 면(예컨대 헥토르의 자존심) 때문에 비효율적인 선택(죽음)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당시 그리스에선 현대인들 같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만 살았던 게 아니었네요. 호모 에티쿠스(윤리적 인간),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호모 수페르비아(자존심 하나로 사는 인간) 등등 다양한 인간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들이 모여서 거대한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탄생한 것이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들 호모 사피엔스의 수많은 선택과 그 선택에 따른 대가(代價) 혹은 기회비용은 놓치기에는 아까운 매력적인 소재랍니다. 이런 관점에서 책 내용을 정리하고 그 선택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의 결정을 분석한 뒤 서평을 써보면 어떨까요?
이 책을 읽고 나서 을유출판사에서 출간된 ‘삼국지 경영학’을 읽고 동양 고전 속의 경영학적 요소들과 서양 신화의 경영학적 요소들을 비교해보는 추가활동도 의미가 있을 겁니다.
꿈이 정치인 기자 소설가 교수 등인 학생들에게는 이런 관점은 어떨까요?
인간과 신이라는 주제에 천착해보는 겁니다. 인간과 신은 어떤 관계일까? 고대 그리스에서 신은 왜 인간의 삶에 적극 개입했을까? 등의 주제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그 고민에 대한 답을 학교생활 기록부 등에 적어보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읽은 학생들에게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6권짜리 대작 ‘신’을 추천합니다. 베르베르의 이 작품에 일리아스에도 등장하는 신들이 실명으로 출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대적 시각에서 이들은 그리스 신화 속 모습과 많이 다릅니다. 작가 베르베르에 의해 재해석된 것이지요. 두 권의 책을 활용해 고대인과 현대인들의 신에 대한 태도를 비교해보는 것도 멋진 서평 주제가 될 것 같은데요?
이과 학생들은 이런 주제에 대해서 고민해 본 뒤 그 고민의 결과를 학생부에 기록해보는 방법을 추천 드립니다.
의사를 꿈꾸는 학생들이라면 책 속에서 드러난 다양한 죽음을 갖고 죽음에 대한 인간의 자세라는 주제를 포착해낼 수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발생하는 숱한 죽음들을 맞이하거나 지켜보는 등장인물들의 태도를 갖고 이야기를 풀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세밀하게 접근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일반인들과 그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들을 비교해 왜 그런 차이가 발생했는지 이유를 써볼 수도 있겠지요.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였던 쉘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권해 드립니다. 고대인들은 우매해서 죽음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두려워했을까요? 과학 기술이 발달된 현대에 사는 우리들은 죽음에 대해서 늘 이성적 논리적으로 접근할까요? 여러분의 생각이 저도 궁금합니다.
공학 연구원이나 기술자가 꿈인 학생들이라면 전쟁의 역사와 전쟁 속에서 사용되는 무기의 원리 등에 대해서 주목해보면 어떨까요?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목마를 컴퓨터의 트로이의 목마와 비교해서 어떤 연유로 그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등등도 흥미로운 탐구 대상입니다. 그리고 나서 전쟁이 과학기술의 진보와 인류의 진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과학사적 측면에서 접근한 뒤 보고서 활동을 추가로 한다면 그야말로 여러분들은 멋진 공학도가 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의대 자연대 공대 희망학생들에게는 후속 독서로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를 추천합니다. 신화를 통해 생물학의 지식을 쉽게 배울 수 있을 거에요.
문이과 융합적인 학문(심리학 생명과학 인류학 자유전공 등등)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에게는 이런 키워드를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의 본질, 과연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인가, 이성의 동물인가? 여기서 다시 헥토르의 죽음을 소환하겠습니다.
헥토로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는 엄청난 선물을 들고 적장 아킬레우스의 천막을 밤에 찾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헥토르의 시신을 달라고. 뜨거운 눈물을 보이며 아킬레우스의 거울 뉴런을 자극시킨 그는 끝내 아킬레우스를 공감시킵니다.
아킬레우스는 한 나라의 임금이지만 아들 앞에서는 그냥 슬픈 아버지일 뿐인 프리아모스를 위로합니다. 아들의 죽음에 오열하는 프리아모스의 감정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공감 뉴런이 작동한 아킬레우스는 어쩌면 그 순간 전쟁에 참여하면 영웅이 될지는 몰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신탁이 떠올랐을지도 모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게 바로 인간의 숙명이니까요. 그러면서 자신의 아버지(펠레우스 왕)가 느낄 슬픔을 미리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헥토르도 프리아모스도 더 이상 적이 아닙니다. 같은 인간일 뿐이죠. 그는 헥토르의 시신을 넘겨주고 장례를 위한 휴전을 선언합니다. 공감 뉴런.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일리아스에 있었습니다.
이처럼 똑같은 책을 읽더라도 자신의 꿈과 전공 적합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읽을 수 있다는 사실, 학생부 종합 전형이 아니라면 과연 가능했을까요? -
※에듀포스트에 실린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신진상의 입시 속 의미 찾기] 섭력충의 고전 속 전공적합성 이야기 : 일리아스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