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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사정관제용 자기소개서 대필에 400만원이라는 언론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인터넷으로 동영상 기사를 다시 보았습니다. 음성을 변조한 사교육 관계자는 자기소개서 대필을 뜻한 게 아니라 자기소개서를 포함한 각종 자료, 즉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주는 데 그 정도 액수(한 400만원)를 받는다는 발언을 했더군요. 기간이 1년인지 1회인지 기사에서는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대충 어떤 업체인지 짐작이 갑니다.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어의가 없는데 자기소개서 하나 잘 써서 대학에 합격할 확률이 몇 %나 될까요? 그리고 자기소개서 하나로 합격시켜줄 대학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기소개서 한 장 대필하는 데 400만원을 지불할지도 궁금하네요. 대한민국 고 3 학부모들의 정보력이라면 현장을 잘 모르는 기자들보다는 몇 수 위일 텐데 도대체 어떤 고 3 학부모가 투자 대비 효과를 거의 보장하지 못할 400만 원짜리 자기소개서 상품에 넘어갈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것도 실적이 전혀 없고 올해 처음 시작하는 입학사정관제 컨설팅 업체 유혹에 말이지요. 제가 컨설팅 업체로부터 직접 들은 건데 수많은 전화 문의가 있었지만 돈을 받고 컨설팅(대필이 아니라 컨설팅입니다)으로 이어진 건은 단 10건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학부모가 어떤 학부모들인데요.
사교육 사정 알면 이건 현실을 전혀 모르는 이야기
이 기회에 사교육과 입학사정관제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 드리지요. 영어를 제외한 나머지 과목. 내신, 수능, 논술, 특목,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모든 사교육은 시험 때문에 존재합니다. 시험 없이 서류 평가와 면접 정도로 당락이 결정되는 입학사정관제에는 사실 사교육이 파고 들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누구는 새로운 사교육을 부추길 거라고 하지만 사교육 종사자들이 들으면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라고 코웃음을 칠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학부모들은 성적이나 등수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는 것에 절대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수시 원서 접수 전에 수백만 원씩 주고 자기소개서를 써달라고 할 고 3 학부모가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신문이나 방송에는 어떤 정책이 발표되고 그 다음날 ‘사교육 들썩’이란 기사를 흔히 보게 되지만 기사 보고 하루 만에 부모들은 결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이런 류의 기사는 제가 보기에는 정책에 흠집을 내고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의심이 드네요.
대필한 자기소개서 효과가 정말 있을까?
고 1~2라면 어떨까요? 일단 입학사정관제 준비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들에게는 자기소개서가 급한 게 아니라 채울 내용이 필요한 거지요. 경시든, 봉사든, 리더십이든 기본적으로 학교가 책임을 지고 학생부에 기재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입학사정관제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자기소개서 대필해주는 학원이 성행할 거라니, 고액 면접 과외가 성행할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기소개서 대필이 말처럼 쉬울까요? 옆에서 조언을 해주거나 써온 글을 첨삭해줄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대필이라…….
그 언론에 보도된 사례를 보건대 논술 학원에서 수시 논술 패키지 상품을 팔면서 자기소개서 첨삭은 공짜로 해준 게 아닌가 싶네요. 입학사정관제 컨설팅 업체들이라면 이 자기소개서(서울의 모외고 학생이라고 하네요)가 자기네들이 대신 써준 거라고 언론에 공개할 리도 없겠고요. “학생들이 도와달라고 했다”는 식으로 원장이 말했던데 그렇다면 수강생이 대충 써온 걸 꼼꼼하게 첨삭해준 정도겠지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봅시다. 누군가 대필해준 자기소개서가 있다고 합시다. 고 3의 입장이 아닌 전문 작가의 입장에서 듣고 쓴 이야기(그것도 학생이 아니라 엄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가 어떤 울림이 있겠습니까? 그런 대필 소개서를 구분해내지 못하는 입학사정관이 정말 있을까요?
면접도 교과 지식을 물어보는 심층 면접이 아닌 행동형 면접(면접 대상의 역량과 과거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행동 속에 드러난 특성을 분석하는 것)인데 이게 학원이나 과외로 대비가 힘듭니다. 설사 그런 대비를 시켜준다는 학원에 자녀를 보낼 학부모가 몇 명이나 될까요? 면접이 시간 당 단가가 가장 높기는 하지만 가장 학부모들이 보내지 않는 학원이 면접 학원입니다.
면접에서 배우는 심층 교과목을 위해서 보내는 거지 면접의 기술, 노하우를 위해 학원을 보내는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물론 초등학생들이 웅변학원이나 스피치 학원을 다니기는 하지만 그 숫자와 액수는 그리 높지 않지요. 일단 논술 학원은 보내는 사람들이 꽤 되지요. 논술학원들은 일단 자기소개서 때문에 입학사정관제 시장에 관심을 가질 법합니다.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자기소개서 쓰는 과정을 개설하면 학원에 수강생들이 구름처럼 몰릴까요?
학부모가 자기소개서 작성을 위해 학원에 몇 번이나 보낼까요? 올해 입시에서는 논술의 영향력이 입학사정관제보다 10배는 더 큽니다. 그런데 그런 논술 학원조차 믿지 못하고 불확실하다면서 안 보내려는 게 학부모들입니다. 그나마 논술 학원을 오래 보내는 학부모가 있는데 그 이유는 뭐가 나올 줄 모르니까 이것저것 다 시켜보자는 뜻이지요. 그런데 자기소개서 작성을 위해 그 오랜 기간을 논술 학원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상담은 공짜라는 인식이 컨설팅 시장의 확대를 막는다
고액 컨설팅 시장이 뜰 거라고 하는데 지금도 수시나 정시 때는 컨설팅 회사는 돈 잘 법니다. 정시 때는 회당 100만원씩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컨설팅 하는 곳도 보았습니다. 정시야 점수로 가는 거니까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지만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합격/불합격을 컨설팅 업체들이 쉽게 맞힐 수 있을까요? 그리고 자기주도학습, 동기부여 전문가들이 입학사정관 컨설팅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돈 많고 공부 안 되는 부잣집 자녀(초등 때는 그 어느 부모도 포기하지 않지요)들로부터 충분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입학사정관제 때문에 새로운 컨설팅 시장이 열리는 건 아니라는 소리지요. 입학사정관제 때문에 학업보다 다른 쪽에 투자하려는 학부모가 늘어나면 학습 기반의 컨설팅 업체들은 시장이 오히려 줄 수도 있습니다.
사교육 중 가장 단가가 비싼 게 고 3 사교육인데 늦었다 싶으면 수능에 올 인을 하거나 수시 논술에 승부를 걸지 누가 월 몇 백 만원씩 들여서 뒤 늦게 입학사정관 맞춤 컨설팅을 하려들까요? 고 1~2 학부모는 고 3 학부모보다 더 느긋하고 지갑을 안 엽니다. 고 1부터 맞춤으로 준비해줄 테니까 “월 얼마씩 돈 내쇼.” 이거에 현혹될 학부모는 정말 적습니다.
고액 컨설팅을 감당해낼 경제적 능력을 갖춘 학부모 자체가 극소수인데다 그 능력을 갖춘 학부모들은 정보력도 뛰어난 경우가 많아 사교육 업체의 어설픈 유혹에 잘 안 넘어갑니다. 아직까지도 학부모들은 컨설팅을 상담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상담은 학원에서 공짜로 받고 학생 점수 올리기 위해 학원을 돈 내고 보내는 거지요. 과연 기자들은 사교육 시장의 이런 원리를 알고 기사를 쓰고 있는 걸까요?
사교육업체 입장 학부모에게 팔 상품이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교육 업체 입장에서는 입학사정관제가 매력이 없는 계륵입니다. 대세인 것 같아 고민을 하지만 시장에 내놓고 팔 상품이 없는 상황입니다. 사교육은 언제나 공교육보다 앞 서 솔루션을 찾아냈지만 그거는 시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험이 있으면 시험에 나올 거를 미리 가르치고 모의고사 본 뒤 레벨 및 성적 알려주면 됩니다.
학교가 두 달에 한 번 시험을 치른다면 학원은 한 주에 한 번 시험을 치르면 됩니다. 내신이든, 수능이든, 논술이든 다 같은 패턴이지요. 그런데 입학사정관제는 이런 패턴의 상품화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입학사정관제로 사교육 업체들 표정관리 한다고요? 입학사정관제로 돈 버는 사교육 만들기는 사교육의 신이라는 그분에게도 힘든 일 아닐까요?
더 궁금하신 내용은 메일로 보내 주세요. sailorss@naver.com
입학사정관제 정말 사교육 부추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