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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넘도록 그림책을 만들던 내게 어느 날, 매너리즘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매너리즘이란 녀석은 나를 단숨에 제압했고, 어느새 난 멍한 상태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이대로 날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 나는 대충 짐을 꾸려 충주에 있는 월악산으로 떠났다. 내게 월악산은 아름다운 자연과 박윤규 선생님의 작업실이 있는 곳이었다.
평소 우리 문화와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시는 박윤규 선생님을 만나 답답한 마음이나 위로 받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선생님은 마당에 핀 매화 꽃잎을 따다 따뜻한 차에 얹어 다정하게 나를 맞아 주셨다. 차를 마신 뒤, 선생님과 나는 월악산에 올랐다. 봄이 시작된 산은 활기찬 생명의 기운이 가득했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어디선가 졸졸졸 물소리가 났다.
우린 물소리를 핑계로 좀 쉬어가기로 했다. 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참방참방 돌을 던지며 쉬던 내 입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노래가 흘러나왔다. -
옆에 선생님이 있는 것도 잊고, <아리랑> 한 곡을 다 부르고 나니 어느새 가슴 한 곳이 뻥! 하고 뚫리는 것 같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저 <아리랑>을 불렀을 뿐인데, <아리랑>에는 어떤 힘이 있는 걸까?
내 노래가 끝나자 선생님께서 한마디 툭 던지셨다.
“이 산을 넘으면 문경새재인 것을 어찌 알고 <아리랑>을 흥얼대나?”
그러고 보니 날아가는 새도 넘기 힘들 만큼 어려운 길이라 ‘아리랑 고개’라고도 하는 문경새재가 가까이 있었다. 왜 우리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아리랑>을 불렀던 것일까?
“선생님, 우리 아이들한테 <아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어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림책《아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있는 곳이면 지구촌 어디를 가더라도 <아리랑>이 있다. 누가 언제부터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민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은 엄마가 불러 주는 달콤한 자장가고, 멀리 떠난 가족을 그리는 노래고, 잔치판에선 흥을 돋우는 노래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두 주먹 불끈 쥐고 희망으로 부르는 노래다.
<아리랑> 속에는 이처럼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 마음속에 <아리랑>이 ‘슬픔’으로만 깊이 각인되어 있는 건 왜 일까?
그건 아마도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이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르는 사람의 마음을 담아서 부르는 <아리랑>, <아리랑>은 곧 민중의 삶과 시대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면 오늘날 부르는 <아리랑>은 어떤 느낌일까?
아이들에게 <아리랑>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물어보았다. 아이들은 대부분 <아리랑>을 2002년 한일 월드컵과 함께 기억하고 있었다. 붉은 옷을 입고, 광장에 모여 목청껏 부르던 <아리랑>은 기쁨, 희망, 응원가라는 의미로 아이들 마음속에 들어와 있었다.
휴, 다행이다! 이제 아이들에게 <아리랑> 속에 담긴 모든 얘기를 해 주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근두근! 우리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아리랑》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생각에 어느새 나를 괴롭히던 매너리즘도 꼬리를 내리고 멀리 사라졌다.
본격적으로 작가와 원고의 방향을 논의하면서 제일 어려웠던 것은 희로애락이 모두 담긴 <아리랑>의 어떤 모습을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보여 주는 것이 좋을지 결정하는 일이었다.
마음은 급한데 결정을 하지 못한 채 안타까운 시간만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작가는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을 어린이 눈높이에 맞게 각색해서 책에 싣자고 했다.
영화 <아리랑>은 1926년 일제 강점기에 상영되어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무성영화이다. 나운규 감독은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불리던 <아리랑>을 현대적으로 편곡하여 영화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한목소리로 부르는 <아리랑>이다.
지금 부르는 <아리랑>의 시작이 된 작품인 만큼 의미가 있지만, 자칫 일제 강점기의 암울하고 슬픈 <아리랑>만 부각될지 모른다는 걱정스런 마음도 있었다. 나의 고민을 듣던 작가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배경이 일제 강점기라고 해서 그 시대의 <아리랑>에 슬픔만 담겨 있다는 생각은 틀린 거야! 그 당시 사람들이 영화 <아리랑>에 열광했던 것은 단지 억눌린 슬픔을 쏟아 내기 위해서가 아니야. 한바탕 울고, 다시 힘을 모아 일어서자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지.”
맞는 말이다! 역시, 난 언제나 선생님에 비하면 하수인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 영진이는 일본 경찰에게 억울하게 끌려가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이렇게 외친다.
“여러분, 저 때문에 울지 마세요. 제가 기쁠 때나 슬플 때 부르던 노래, 바로 그 노래 <아리랑>을 불러 주세요. 저는 꼭 돌아올 겁니다! 반드시 다시 돌아와 <아리랑>을 부를 것입니다!”
영진이가 부르는 <아리랑>은 슬픔의 노래가 아니다. 다시 일어서려는 민족의 다짐이자, 포기하지 않는 의지이고, 미래를 향한 희망의 외침인 것이다.
이제 나의 고민은 끝났고, 결정은 내려졌다!
드디어 본격적인 글과 그림 작업에 들어갔다. 영화 <아리랑>을 어린이가 이해하기 쉽게 고쳐 쓰고, 그림은 당시 흑백 무성영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내기 위해 도깨비 작가로 유명한 한병호 선생님이 판화 기법으로 그렸다.
또 당시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무성영화에서 관객을 울리고 웃기던 변사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녹음했다.
이 책 한 권으로 아이들이 <아리랑>에 담긴 역사와 의미를 모두 이해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이야기로 만나며 아이들이 우리 <아리랑>과 더욱 친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어린이가 부른 우리나라 대표 <아리랑>을 녹음해 CD에 담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은 흔히 명창들의 소리로 듣기 마련인데, 떨기나 꺾임을 절묘하게 넘나들며 부르는 명창의 <아리랑>은 아이들에겐(솔직히 대부분의 어른들에게도) 낯설고 따라 부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아리랑>의 여러 가지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책을 본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이 자기만의 이야기가 담긴 <아리랑>을 부르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 그렇게 <아리랑>은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다음 세대로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영원히!
푸른숲주니어 출판사 차장 송지현 제공
[오늘 이 책]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힘, 아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