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논술] 타이탄
강유정 영화평론가·문학박사
기사입력 2010.04.29 03:20

영화를 통한 신화의 재창조… 화려한 CG에 숨겨진… 원작 속 깊은 뜻 파악해야…

  • 그리스·로마 신화는 서구 인문학적 상상력의 중심이 돼 왔다. 워낙 오래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성정을 지닌 신의 면모나 다양한 관계가 인간 세상의 희로애락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할리우드는 이 오래된 상상력을 소재로 다양한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그런데 신화의 재창조 과정에서 돌이켜 봐야 할 문제는 없을까?

    페르세우스 신화를 중심으로 한 영화 '타이탄'이 최근 국내에서 개봉됐다. 페르세우스 신화는 그리스·로마 신화 중에서 특별히 예술가들에게 사랑받은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를 잉태한 어머니 다나에에 관한 일화는 16세기 화가 티치아노부터 20세기 화가 클림트에 이르기까지 여러 예술가의 손에서 재창조되곤 했다.

  • 페르세우스는 빗물로 변한 제우스와 다나에 사이에서 잉태된 아들이다. 외할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버림받았던 그는 그 유명한 페르세우스의 신발과 방패로 위기를 극복하고 이웃 나라 공주 안드로메다의 목숨까지 구하게 된다.

    영화 '타이탄'은 이 풍부한 신화 속에서 영웅 페르세우스의 면모를 가져온다. 아쉬운 것은 그 영웅적 모습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속의 슈퍼히어로와 지나치게 닮았다는 점이다. '데미갓'이라고 부르는 인간과 신의 혼혈아인 페르세우스는 원작 신화와 달리 다나에가 아닌 아르고스의 왕비에게서 태어난다. 신의 권능에 저항했던 아르고스의 왕은 그로 인해 신들의 분노를 사게 되고 지옥의 왕 하데스는 이 틈을 타 어둠의 세력으로 전 세계를 통치하고자 한다.

    이 각색 과정에서 에티오피아의 공주였던 안드로메다는 아르고스의 공주로, 페르세우스의 연인은 같은 데미갓 혈통인 이오로 바뀐다. 신의 자식이지만 신을 거부하는 페르세우스의 모습은 오히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나 시지프스의 모습과 닮았다. 인간에게 불과 지혜를 가져다주기 위해 신에게 저항했던 인간들 말이다.

    신화 속에서 볼 수 없었던 몇몇 창조물도 등장한다. 크라켄이나 사막의 전갈, 그리고 정령이라고 불리는 죽지 않는 사자들이다. 이들의 모습은 우리가 이미 영화 '미이라'나 '반지의 제왕'에서 보았던 사막의 피조물과 유사하다. 신화에 없었으나 창조된 인물들은 '스펙터클'이라고 불리는 영화의 시각적 재미를 위해 만들어졌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만나러 가는 동안의 긴 시간을 이야기가 아닌 시각적 자극으로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피터 잭슨 감독의 영화 '반지의 제왕' 덕분에 할리우드는 환상적 세계에 대한 훌륭한 참조사항을 갖게 됐다. '반지의 제왕' 이후 나온 영화에서 CG(컴퓨터 그래픽)를 이용해 만든 환상의 피조물들이 '반지의 제왕'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까닭도 이 때문일 것이다. 마녀 혹은 메두사를 만나러 가는 과정의 미술적 묘사도 지금까지의 영화적 표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고난의 길로서의 사막이나 바위산의 이미지가 너무나 상투적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블록버스터의 볼거리로 제공된 페르세우스 신화가 원작이 가진 풍부한 상징적 의미를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다. 눈이 마주친 모든 것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메두사를 거울에 비춰서 보는 페르세우스의 지혜는 세상의 고통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예술가의 정신으로 묘사되곤 했다. 그의 신발 역시도 다양한 상징성으로 해석되곤 했다.

    인간과 신의 중간으로서 페루세우스가 겪는 갈등, 그리고 마침내 신의 섭리 안에서 구원받는 영화 '타이탄'의 논리는 자기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수많은 미국적 영웅과 닮았다. 세계 정복과 통치를 꿈꾸는 악의 화신으로 둔갑한 하데스 역시도 그 의미의 중요성을 침범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최근 한국에서 유행 중인 고대사 소재의 역사 드라마에서도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때로 고증이 잘못된 역사적 이야기가 대중매체의 영향력 때문에 사실인 냥 전달될 수도 있듯이 말이다.

    할리우드가 신화를 주목하는 것은 신화 속에 다양한 인물형과 드라마가 있기 때문이다. 폭넓은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신화 속에는 현대영화의 기술을 통해 환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해왔던 신의 이미지를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기회가 되니 말이다. 하지만 각색이 중요한 주제나 상징들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뛰어난 표현 능력만큼 상징성에 대한 속 깊은 이해도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더 생각해 볼 문제

    1. 우리의 전통 설화 중 영화화될 만한 이야기는 어떤 것이 있을까?

    2. 컴퓨터 시뮬레이션 게임의 다양한 인물과 영웅들이 등장하는 영화 속 인물들의 차이점을 생각해보자.

    3. 그리스·로마 신화 가운데서 어떤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지, 이유는 무엇인지 적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