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논술] 슬픈 기억을 삭제했다고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황희연 영화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10.04.08 02:54

이터널 선샤인

  • ◆기억을 지우면 사랑도 지워질까?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것일까, '머리'로 하는 것일까? 좀처럼 해답을 내리기 어려운 오래된 난제다. 과학자들은 호르몬의 화학반응을 운운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뇌 작용의 일부로 해석하려 하지만, 낭만파 감독의 대답은 철이 없되 따뜻하고 긍정적이다.

    사랑은 당연히 가슴으로 하는 것이고, 그 감정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불변의 것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먼과 미셸 공드리 감독이 그런 주장을 설파하는 사람들이다.

    아이디어 뱅크로 소문난 두 사람이 함께 만든 멜로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남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의 기억이 사라지면 이론상으로는 사랑의 감정도 모두 사라져야 마땅하지만,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들은 그렇지 않다. 아프고 힘들어서 기억을 냉큼 지워놓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만나 사랑을 시작한다.

  •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한 장면.
    ▲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한 장면.
    ◆처음인줄 알았던 그들의 두 번째 사랑

    2년 전 어느 날,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그때도 이미 함께 있었고 사랑하는 사이였다. 조금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나름 행복하고 낭만적인 데이트가 이어졌다. 그런데 클레멘타인이 조엘과 싸우고 홧김에 기억을 삭제하면서 이야기는 복잡하게 흘러간다. 갑자기 조엘을 낯설게 대하는 클레멘타인. 그녀는 그를 모른 척하는 것일까, 진짜 모르는 것일까?

    모호한 질문을 끌어 앉은 채 절망하고 있는 조엘에게 하나의 단서가 포착된다. 친구 부부에게 온 한 장의 엽서. 그 안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클레멘타인 그루친스키 양은 조엘 배리시에 관한 기억을 삭제했습니다. 라쿠나 주식회사 보냄." 2004년, 뉴욕을 배경으로 한 평범한 멜로드라마가 던져놓는 '비밀'치고는 꽤 황당하다. 그러니까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기억을 잃은 척한 게 아니라, 진짜 잃어버렸을 확률이 높다. 그것도 스스로 원해서 조엘의 기억을 삭제한 것이 분명하다. 기억이 없으니, 사랑도 있을 리 없다. 그들의 사랑은 '기억 삭제'라는 간단한 뇌 조작을 통해 완벽하게 소멸했다. '이터널 선샤인'의 문제제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기억을 잃은 두 사람은 이제 어떻게 될까? 라쿠나 주식회사의 주장처럼, 기억은 간단하게 소멸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인간은 슬픈 기억을 삭제했다고 해서 마냥 행복해질 수 있을까? 잠시 지독한 아픔을 겪을지라도 사랑과 아픔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행복한 삶은 아닐까?

    '이터널 선샤인'은 첫 장면에서 니체의 격언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다"를 들먹이며 망각의 즐거움을 설파하지만, 사실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과는 정반대다. 기억을 지운 두 사람은 전혀 행복하지 않고, 여전히 서로를 간절히 원한다. 시간이 지나면 조엘은 클레멘타인의 자유분방함에 혀를 내두르고, 머리 색깔을 자주 바꾸는 버릇과 술에 탐닉하는 나쁜 습관에 짜증을 낼지 모르지만, 지금은 마냥 클레멘타인이 사랑스럽다. 조엘에 대한 클레멘타인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기억은 사라져도 사랑은 끈질기게 남아있다. 두 사람은 그 사랑의 불씨에 다시 온기를 지피기로 마음먹는다.

    '이터널 선샤인'은 결국 기억을 지워도 사랑은 영원히 반복되는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사랑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낭만적인 주장을 한번 믿어보고 싶어진다. 사랑은 그냥 받아들여야지, 분석하려 하는 순간 허무하게 사라지는 이상한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더 생각해 볼 문제

    1.'어웨이 프롬 허' '첫 키스만 50번째' '헨리 이야기' '메멘토' 등 기억의 문제를 다룬 영화를 더 찾아보고, 각 영화의 주제를 자신의 시각으로 정리해보자.

    2.'이터널 선샤인'의 라쿠나 회사처럼 기억을 삭제해주는 곳이 실제로 있다면, 자신은 어떤 기억을 삭제하고 싶은지 생각해보자. 또 삭제하고 싶은 기억을 지웠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무엇인지 고민해보자.

    3. 클레멘타인은 기억을 지웠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영화의 주장처럼 기억을 지워도 사랑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일까?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적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