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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 개교한 한국예술종합학교는 영화, 연극, 무용 등 여러 분야에서 국제적 명성을 쌓아왔다. 각종 콩쿠르에서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거둔 우승 실적은 셀 수 없이 많다. 잘 나가던 학교가 3월 중순경부터 두 달여간 문화체육관광부의 정밀 감사를 받고 나서 존폐 및 구조조정 논란에 휩싸였다.
총장은 근무지 이탈 및 공금 횡령, 교육 과정 부실 운영 등의 이유로 중징계 조치가 내려졌고, 총장은 사퇴했다. 학교의 모든 이론과와 카이스트, 포스텍, 한국예술종합학교가 함께 하는 과학-예술 통섭교육은 축소하거나 폐지할 것을 권고받았다.
학생들은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1인 시위 및 각종 퍼포먼스를 통해 구조조정의 부당함을 알리고 있다. 학교 사태를 염려하는 영화감독 100인 선언이 이어지면서 이 사안은 예술계 전반의 예술교육 논쟁으로 점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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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예술교육에 대한 시각:"No Theory No Arts?"
문화체육관광부의 감사에서는 이론과를 폐지해 실기교육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실적이 없는 협동과정은 폐지하고, 이 과정을 주도한 교수들을 중징계하는 것으로 결론났다. 감사 결과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예술인들은 이론과가 커지면 예술에서 엘리트주의가 번창하고 창의성이 떨어질 것을우려한다.
예술은 다른 인문·사회 분야와 달리 인지적 영역보다 행동적 영역이 강조된다. 음악 이론에 대한 해박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는 음악가, 연극의 기원이나 역사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는 사람보다 연기를 잘하는 연극배우가 관객을 감동시킨다. 현대 예술이 상업화되고, 세계화되는 상황 속에서 경쟁력을 가져 문화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각종 기능 및 기술을 끊임없이 연마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문화소비자들은 냉혹해 실력이 없는 예술가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쥬라기 공원이나 디워가 흥행한 것은 뛰어난 그래픽 기술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대학 입학시험에서 석고 데생의 실력을 측정하고, 음악대학 시험에서 연주 실력을 확인하는 것은 예술가의 기본기는 실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영어 단어 잘 외운다고 영어회화 실력이 느는 것은 아니다. 예술영재교육과 체계적인 실기교육을 통한 전문예술인을 양성한다는 최초의 학교 설립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예술가는 이론으로 비평가와 감상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엄선된 객관적 작품으로 만나야 한다.
이론과 실기교육이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예술인들은 21세기는 하이브리드 시대이고, 퓨전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정의한다. 줄리아드나 칼아츠, MIT의 미디어 랩 등 해외 유명 예술대학도 미학이나 역사, 철학 등의 이론 수업을 실기와 병행하고, 공대와 예술대 간의 통섭 교육이 활발하다.
창의적인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해당 부류의 작품 역사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은 기발하다고 생각하며 작품을 제작하지만, 누군가 예전에 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예술가는 관객과 비평가를 만나는 소통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고, 비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며 자신의 예술관을 이론화하는 과정에 독창적인 예술가로 인정받는다.
1917년 뒤샹은 공장에서 만든 변기를 그냥 가져다가 서명만 하고 전시했다. 정교한 예술적 기교를 부리지 않고 단지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만을 보여주었던 이 작품은 현대 미술을 여는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1952년 존 케이지는 '4분33초'라는 제목의 연주회를 열었는데 어떤 연주자의 연주도 없이 단지 관객의 침묵만이 연주였다. 이 역시 현대 음악의 새 장을 여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렇듯 현대 예술은 실기보다 자신의 예술관을 정교하게 이론화하는 작업이 중요해졌다. 문화 산업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문화 기획 능력, 현대 사회의 흐름을 문화예술적 안목으로 분석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전통적인 예술 장르의 범주를 해체하고 새로운 차원의 예술 세계를 창조하려면 장르와 장르, 이론과 실기, 예술과 과학 사이의 교류와 네트워크가 일상화돼야 한다.
감상에서도 아는 만큼 보이고, 창작에서도 아는 만큼 창조하는 법이다. 영혼과 이론 없이 육체의 기계적 작동에만 충실한 예술영재는 박물관에 박제품으로 전시될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정치와 예술의 관계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구조조정 논란은 예술인을 양성하는 교육철학 논쟁이 아니라 정치적 논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좌파의 온상지라는 보수 예술단체의 지적에 대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앞장서서 감사를 하여 총장을 사퇴시켰다는 분석이다.
진보적 예술인들은 이 논란은 마치 나치 시대에 히틀러가 괴벨스를 통해 기술 산업과 예술을 통합해 교육하던 바우하우스에 공산주의 딱지를 붙이며 폐교했던 사례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는 정치적 이념 차이를 가지고 코드 인사를 하는 것이 예술의 발전에 옳은가, 아니면 효율적인가의 논의로 정리할 수 있다.
어떠한 예술도 사회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과 문화 관료에 의해 예술 대학의 학제 개편이 주도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예술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주장과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는지 논의해야 한다. 예술의 자유가 이념의 틀 속에서 집단의 이익을 옹호하는 논리로 기능 할 수도 있다.
'art is our power'가 '예술은 우리의 힘'으로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표어가 되기도 하지만 '예술은 우리의 권력'으로 예술의 정치성을 표현하는 논리가 될 수도 있다. 즉, 예술교육 논쟁이 정치적 이념과 만나면 학문과 자유에 대한 전반적 논쟁으로 확대된다.
[시사이슈로 본 논술] 예술교육이 정치적 이념과 만난다면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와바람직한 예술교육 논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