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이슈로 본 논술] 부자는 벌금 더 내라… 공평한 처벌인가
강방식 동북고 교사·EBS 사고와 논술 강사
기사입력 2009.10.08 03:16

'일수벌금제도' 도입 논란

  • ◆일수벌금제도 도입 검토

    1992년 법무부 형사법 개정 과정에 일수벌금제도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2004년 사법개혁위원회 활동 과정에서 형벌체계를 개선하는 자리에 이 제도에 대한 논의가 전개됐다. "법원에 다양하고 정교한 형벌 선택권을 부여해 범죄인이 지은 죄에 대해 보다 적정하고 합리적인 죗값을 치르도록 하자"는 취지의 일환이다.

    작년 말에 경기 불황으로 서민 경제가 어려워지자 검찰은 올 초부터 한시적으로 생계형 범죄에 대해 벌금을 깎아주거나 벌금 분납, 납부 연기 제도를 도입했고, 장기적으로는 일수벌금제도의 현실화를 위한 논의를 준비하고 있다. 올 8월에 이명박 대통령은 "생계형 운전자들을 감안해 교통범칙금을 소득 수준에 따라 차등 부과하는 방안을 강구해보라"고 지시하면서 법조계를 중심으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일수벌금제도의 의미와 외국의 사

    벌금 제도는 크게 똑같은 죄에 대해서 똑같은 금액을 부과하는 총액벌금제가 있고, 소득과 재산에 따라 차등을 두는 일수벌금제가 있다. 한국일본은 전자를 택하고 있고, 서유럽 선진국들은 후자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일수(日數)벌금제(Daily Fines System)는 범죄자가 저지른 불법의 정도를 계산해 벌금일수를 계산하고, 1일 벌금액을 범죄자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책정한 후 둘을 곱해 벌금을 정하는 제도이다. 대표적으로, 핀란드노키아 부회장인 안시 반요키 사례가 유명하다.

    50km/h 제한도로에서 75km/h로 오토바이를 타다가 과속으로 적발돼 14일분의 급여인 11만 6000유로(약 1억3000만원)의 범칙금을 냈다. 이 제도는 핀란드를 포함한 북유럽3개국은 20세기 초반에 도입됐고, 오스트리아독일은 1970년대 중반에, 프랑스는 1980년대 초반에 실시됐다.


    ◆일수벌금제도 논의 배경

    벌금의 경우 경제적 여건에 따라 체감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형벌의 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고물트럭을 이용해 하루 5만원을 버는 사람에게 교통 범칙금 5만원은 생존값이지만, 연봉 수억원인 사람에게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껌값에 불과하다.

    범법자의 빈부격차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총액벌금제는 부자들에게는 형벌의 효과가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너무 치명적이다. 사회적 약자나 경제적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징역형의 집행유예보다 약한 처벌인 벌금형이 더 강한 처벌이라고 느낄 수 있다.

    벌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하루에 5만원 정도의 비율로 노역장에 유치되기도 하는데 최근에는 1년에 3~4만명 정도까지 이른다. 인권단체들은 검찰이 이런 점을 악용해 장애인 운동이나 노동운동 등 각종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탄압의 방법으로 벌금형을 무리하게 사용한다고 지적한다.


    ◆일수벌금제도의 문제점

    첫째, 일수벌금제도가 시행되려면 정확한 소득수준이 파악돼야 한다. 재산이나 소득을 숨기는 경우가 많은 우리나라의 경우 오히려 봉급생활자만 불리해질 수 있다. 역으로 생각하면 일수벌금제도가 시행되는 나라는 그만큼 경제적으로 투명하다는 반증이다. 국민연금이나 의료보험제도 등에서 소득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고 있고, 국세청 자료 및 신용평가회사의 자료를 통해 개인의 소득을 파악할 수 있다는 대안이 있다. 하지만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인권 시비가 있을 수도 있다.

    둘째, 총액벌금제는 공정한 분배기준으로 보면 문제점이 많지만 범죄와 관련이 없는 범죄인의 재산이 형벌의 양을 정하는 주된 기준이 된다는 점이 크게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당한 부의 추구 및 축적을 제한하는 것이다. 단지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중형을 선고받는 거나 마찬가지다. 선거법상 당선 무효형이 벌금 100만원인데 이것도 재산의 정도에 따라 달리 책정해야 하는 지 등, 형법의 근본 체계를 무너뜨릴 위험성이 많다.


    ◆합리적인 벌금제도의 구현과 더 논의할 점

    벌금 제도 같은 형벌을 왜 부과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징벌의 의미와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은 범죄 예방 효과이다. 징벌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주는 것인데, 벌금은 주로 경제적 고통을 주는 것이다. 수천억대 연봉자는 교통범칙금 5만원을 아무리 많이 발부해도 법의 위력이 전해지기 어렵다.

    고통의 정도 차이가 다른데 과연 공평한 처벌이라 할 수 있는가? 이는 사고예방을 목적으로 생겨난 보험제도의 '자기부담금제도'와 유사한 맥락이다. 음주나 무면허 운전으로 사고 발생할 경우에 일정 금액까지는 운전자가 부담하기 때문에 음주 및 무면허 운전이 자제된다.

    또한 법경제학에서 기대이익과 기대비용의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범죄인도 자기 효용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하는 합리적 인간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서 총액벌금제도는 부자들에게 기대비용은 없는 것으로 계산된다. 총액벌금제는 잘못 운영되면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다. 한 해에 100만명이 벌금형 전과자가 되는 시대에 가장 합리적인 형벌 체계를 마련하는 것은 사회정의 실현에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