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이슈로 본 논술] 제주 올레길 개척이 주는 의미
강방식 동북고 교사·EBS 사고와 논술 강사
기사입력 2010.01.14 03:54

인간은 걸으면서 사유… 질주하는 문명에 반성 기회

  • ◆제주 올레길 탄생 과정

    큰 길에서 집 대문까지 이어진 아주 좁은 골목길을 일컫는 제주도 말인 '올레'가 전국적으로 걷기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제주 출신 언론인 서명숙씨가 직장을 그만두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 800km를 걸으면서 제주도 올레길을 생각해냈다.

    산티아고 길은 고행의 길로써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가 걸었던 순례길이다. 파울로 코엘료도 이 길을 걸으면서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됐다.

    제주 올레길은 2007년 9월에 말미오름에서 섭지코지에 이르는 제1코스가 만들어진 이후, 작년 12월에 15번째 코스가 만들어졌다. 작년 6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도 한아세안특별정상회의에서 아세안 10개국 유학생과 함께 올레길을 걸으며 제주를 홍보하기도 했다.

    네팔의 트레킹 코스, 뉴질랜드의 밀포드트랙, 영국의 풋패스, 프랑스의 랑도네, 미국의 트레일, 일본의 자연보도가 있다면 한국에는 제주 올레길이 있다. 올레는 우리나라에서 트레킹 코스의 일반명사가 됐고, 세계적인 트레킹 코스가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관광 패러다임을 바꾼 제주 올레길

    제주 올레길은 '점(點) 여행' 패러다임을 '선(線) 여행' 패러다임으로 바꿨다. 점 여행이란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를 통해 이동한 후 명소에서만 쫓기는 일정 속에서 관람하고 다른 명소로 이동하는 여행이다.

    선 여행이란 걸으면서 보는 것 자체가 관람이고, 걸어다니는 길이 명소가 된다. 올레길은 보는 여행에서 걷는 여행, 즉 철저히 아날로그적인 연속적 개념을 이용한 여행이다. 탈문명의 경험을 하는 것이고, 불편함을 감내하고 즐기는 여행이다.

    새로운 도로를 만들어 관광객들의 교통 편리를 제공해주면 관광수입이 늘어날 것 같지만, 관광객들은 빨리 왔다 빨리 가버려 오히려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올레길이 활성화되자 경유형 여행이 체류형으로 바뀌고, 지역주민에게 최대한의 이익이 돌아갔다. 소규모 음식점, 할망 민박, 구멍가게, 버스나 택시 같은 대중 교통 이용이 많아졌다.

    올레길 열풍은 300km가 넘는 지리산 둘레길을 조성했고, 전국적으로 올레라는 명칭을 사용한 도보길을 만들었다. 예술평론가인 수잔 손탁은 '사진에 관하여'에서 "이해라는 것은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보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했다. 새로운 여행 스타일을 통해 제주의 속살을 느끼게 되면서 새로운 제주 보기가 가능해졌고, 그것이 오히려 제주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첫걸음이 되고 있다.

     

  • 조선일보 DB
올레걷기 행사 참가자들이 서귀포시 성산읍 광치기 해
안에서 출발해 서귀포시 시흥리 해안도로, 알오름, 시흥
초등학교로 이어지는 제1코스 구간을 걷고 있다.
    ▲ 조선일보 DB 올레걷기 행사 참가자들이 서귀포시 성산읍 광치기 해 안에서 출발해 서귀포시 시흥리 해안도로, 알오름, 시흥 초등학교로 이어지는 제1코스 구간을 걷고 있다.
    ◆걷기의 생태학적 의미

    많은 사람이 걷지 않는 작은 길을 걸을 때는 약간의 두려움과 머뭇거림이 있다. 눈에 확 띠는 이정표가 없이 걷다보면 샛길로 빠져서 길을 헤맬 수가 있다. 이 때 새로운 길을 선택해 걷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 특성인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 자유를 누리면 가식이 없는 사람과 꾸미지 않은 자연을 만날 수 있다.

    구불구불 이어진 제주 돌담길을 따라 걷다보면 인공적 미보다 자연적 미에 경도된다. 자연의 다양한 모습을 모든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연과 일체감을 이룬다. 올레길을 걷는 것은 큰 아스팔트길에 의해 끊어지고 막히고 사라져버린 길을 복원해내는 것으로써 생명운동의 시작이다.

    걷는 것은 근력 강화보다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으로서 의미가 크다. 현대 문명과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인 말초적 자극과 무조건적 반응 시스템을 해체시켜 왜곡된 감각 기능을 정상으로 돌려놓는다.

    ◆걷기의 사회학적 의미

    자연스러운 호흡에 맞게 걷다보면 디지털의 세계, 나노의 세계에서 촌각을 다투며 사는 질주하는 세계에 대해 반성한다. 자연의 속도를 극복하는 것이 문명의 발전이라고 했지만 속도를 낼수록 인간은 기계가 되고 기계처럼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했다.

    '놀멍 쉬멍 걸으멍'('놀면서 쉬면서 걸으면서'의 제주도 사투리)이 제주 올레길 걷기의 모토이다. 성실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 걷기는 폴 라파르그가 주창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떠올린다. 이 권리를 제주도 말로 '간세다리 정신'이라고 부른다. 놀고 쉬는 것이 창의적 인간의 전제라는 것을 호이징가는 호모루덴스(Homo Ludens)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걷기는 항의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광우병 관련 촛불집회에서, 새만금 간척사업을 반대하는 삼보일배에서,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는 시위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걸었다. 간디는 소금행진을 통해 독립을 호소했다. 인도인의 소금 생산을 금지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대한 항의표시로 간디와 추종자들은 수백 킬로미터를 걸었다. 마틴 루터 킹은 흑백차별의 부당함을 평화로운 행진을 통해 알렸다.

     

  • ◆걷기의 철학적 의미

    철학자들은 걸으면서 사색을 한다. 소요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학원 안의 나무 사이를 산책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칸트는 산책하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알려졌고, 몽테뉴는 걷지 않으면 사유는 죽고 정신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일본의 하이쿠 시인 바쇼는 자연과 하나 되는 과정에서 위대한 예술가는 탄생한다고 보았다. 그는 걷기를 통해 자연과 친밀감을 느끼고 시를 지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걸음을 멈추면 명상도 멈춘다고 한 루소, 걷기를 생활화 한 시민불복종 운동의 상징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 걷기를 예찬한 니체와 키에르케고르 등을 통해 철학과 걷기는 깊은 상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걷게 되면서 사유하고,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이 향상됐다는 것이 호모 에렉투스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들의 주장이다. 생각은 머리가 아닌 발로 한다는 것을 제주 올레길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