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논술] 우리 삶에서 '일'이 사라진다면…
황희연 영화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09.04.16 02:54

'어바웃 슈미트'

  • 신문을 들추면 나도 모르게 자꾸 인상이 찌푸려진다. 부동산 경기 침체, 주식시장 사실상 붕괴, 실업률 최고, 휘발유 가격 다시 최고치 경신…. 기분 좋은 기사는 하나도 없고 한숨 쉴 일만 늘어간다.

    그중에서도 학생들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일 만한 뉴스는 청년 실업률 사상 최고치 기록에 관한 기사다. 등록금을 일 년에 1000만원씩 내고 대학에 다녀 결국 월 88만 원짜리 인생을 살게 된다면, 혹은 그런 일자리마저 구하지 못해 놀고먹는 신세가 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불안감을 잠시 접어두고 위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꿔보자. 나는 왜 굳이 직장에 다니려고 하는가? 인간은 왜 노동을 하기 위해 이토록 애쓰는 것일까?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대답은 조금 진부하고 전형적이다. 인간은 먹고살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노동을 간절히 원한다.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영화 '어바웃 슈미트'의 주인공은 노동하지 않는 것의 괴로움을 온몸으로 증명해주는 인간이다. 전직 보험회사 부사장으로 나름 잘 나가는 시절을 보냈던 워렌 슈미트(잭 니콜슨)는 명예로운 은퇴를 앞두고 있다. 정년 퇴임식에 모인 사람들은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해 그의 업적을 칭찬한다.

    "그는 은퇴하면서 뒤를 돌아볼 때 '난 해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슈미트는 '뭔가 의미 있는 일에 인생을 바친 남자'가 분명하다.

    하지만 칭찬을 듣는 슈미트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다. 초보 백수로서 인생 제2막을 시작하는 슈미트는 이 사회에서 폐기처분 됐다는 절망감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 평생 자신의 땀과 노력으로 일군 부사장 자리는 이미 젊고 패기 있는 젊은이에게 넘어가 버렸다. 후임자는 슈미트의 정년 퇴임식에서 "앞으로도 당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슈미트가 회사에 찾아가자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도와주실 일은 전혀 없습니다. 아주 쉽게 일이 풀려가고 있어요."

    온종일 노는 것밖에 할 일이 없는 워렌 슈미트는 이제 어떤 생활을 이어갈까. 히트곡을 작곡한 아버지 덕분에 평생 돈 걱정 없이 사는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화려한 백수 윌 프리먼(휴 그랜트)은 일하지 않는 삶을 별로 괴로워하지 않지만, 슈미트는 다르다.

    노는 법을 모른 채 평생을 살아온 그는 아내가 차려준 이색적인 캠핑카 만찬에도 시큰둥하다. 한가롭게 텔레비전을 보는 생활에도 별반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무료하게 TV 리모컨을 돌리던 그를 사로잡는 것은 한 TV 광고. "월 22달러, 하루 72센트만 있으면 어려운 소년, 소녀들을 도울 수 있다"는 캠페인 광고에 꽂힌 슈미트는 두 눈을 반짝이며 전화기를 집어 든다.

    심술궂은 할아버지가 난데없이 불우이웃 돕기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시장에서 쫓겨난 그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는 상황이다. '어바웃 슈미트'는 그가 처한 상황을 좀 더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딸과의 불화.

    딸은 어머니를 볼품없는 관에 눕힌 아버지를 원망하고, 아버지는 탐탁지 않은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우기는 딸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식에게조차 위로받지 못하는 신세가 된 슈미트는 불우이웃 캠페인의 일환으로 알게 된 탄자니아 소년 엔두구에게 열심히 편지를 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의 끔찍함부터 형이 2년 전 당뇨로 다리를 잃은 사건까지, 구구절절 적어나간 글귀 안에는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외로움이 함께 담긴다.

  • 누구에게도 솔직하지 못했던 슈미트는 편지 속에서만은 지극히 솔직하다. 그의 넋두리를 듣고 있으면 고령화 사회, 이 시대의 중심에서 비켜난 노인들의 절망감이 아우성처럼 들려오는 것 같다. 슈미트가 절망에 빠진 이유는 노동시장에서 쫓겨난 것도 있지만, 평생 의미 있는 일을 한 적이 없다는 패배의식 탓이 크다.

    그는 죽기 전에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겠다며 탐탁지 않은 딸의 결혼을 막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모든 시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딸의 결혼식에서 마음에도 없는 축사를 늘어놓고 엔두구에게 푸념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세상에 변화를 주는 것이겠지. 근데 난 무엇을 달라지게 한 거지? 이 세상이 나 때문에 더 좋아진 게 있을까? 난 결국 실패했단다."

    '어바웃 슈미트'는 노동시장에서 쫓겨난 한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묻는다. 사회에 몸바치고, 자식에게 헌신하는 삶만이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엔두구가 보낸 귀여운 그림엽서는 실패한 줄 알았던 슈미트의 삶을 조금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놓는다. 인생의 낙오자라는 슈미트의 자가진단은 완전히 틀렸다. 엔두구의 진단에 따르면, 슈미트는 분명 성공한 인생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

    1. 고령 사회, 고령화 사회, 초고령 사회의 정의를 구분해보고, 이런 사회에서 벌어질 구체적인 문제점들을 영화 '어바웃 슈미트'에서 찾아보자.

    2. 슈미트는 '노동하지 않는 삶'을 못 견디는 인물이다. 인간에게 노동은 어떤 의미인지, 슈미트의 예를 통해 분석해보자.

    3. 영화 마지막, 슈미트는 엔두구의 편지를 받고 눈물을 흘린다. 슈미트가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자신의 생각을 적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