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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씨 표류기'의 남자주인공 김씨(정재영)의 삶은 실적 미달, 부도 직전의 위기 상황이다. 직장에선 구조조정 당하고 오래 사귄 연인에겐 이별을 통고받은 김씨는 관계를 맺을 사람이 전무한 상황. 영화는 자살 직전의 남자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영화 첫 장면에서 대출이자 미납을 알리는 은행 직원에게 "용기를 줘서 고맙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한강에 몸을 던진다. 죽을 각오로 장렬하게 몸을 던졌으나 실패가 특기인 이 남자는 자살마저도 쉽지 않다. 죽는 데도 실패한 남자는 한강 한가운데 있는 무인도로 정신없이 쓸려간다. 그곳의 이름은 밤섬. 저 멀리 63빌딩과 값비싼 아파트가 한눈에 들어오는 참 현대적인 풍경의 무인도다. -
김씨가 표류하게 된 곳의 지정학적 위치는 의미심장하다. 한때 잘 나가는 샐러리맨이었던 김씨는 현재 신빈곤층으로 전락한 상황. 신빈곤층은 2007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실직 혹은 사업 실패로 중산층에서 갑작스럽게 빈곤층으로 전락한 서민층을 뜻하는 용어다.
이들이 어떤 면에서 빈곤층보다 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이유는 도움을 호소할 곳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신빈곤층은 당장 쌀이 떨어지고 각종 공과금이 밀려 전기와 가스가 끊어져도 정부의 복지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한다.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신빈곤층은 자연스럽게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사회 밖으로 멀찍이 떨어져 나간다.
김씨가 표류하는 밤섬의 위치는 정확히 그런 곳이다. 저 멀리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사람들이 바글거리지만, 살려달라고 외쳐도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남자는 모래사장 위에 'HELP'라는 글씨를 새기고 고함을 치며 밤섬에서 나가기 위해 애를 쓰다가 불현듯 깨닫는다.
여기서 나간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는 'HELP'라는 글자를 'HELLO'로 바꾸고, 생존의 몸부림 대신 '적응'을 배우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 과정을 진화의 서사시처럼 그려나간다. 꽃잎을 따먹고 버섯을 캐먹던 남자는 낚시를 하고 사냥을 하고 짐승의 알을 채집하며 노동의 즐거움을 배운다.
요리를 하기 위해 불과 도구를 이용하고, 따뜻한 집을 만들고, 심지어 곡식까지 키운다. 이제 밤섬의 김씨에게 사회적 관계는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 자체로 너무나도 행복하다.
그런데 철저하게 고립된 삶을 즐기는 이 남자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 김씨(정려원)는 학창시절 왕따를 당하고 나서 오랫동안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다.
스스로 동굴 안에 몸을 숨긴 여자는 현실에선 철저히 고립돼 살지만, 인터넷상에선 '간지 작살'의 멋진 여성으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녀의 취미는 망원렌즈로 달 사진을 촬영하는 것. 방안에 처박혀 달 사진 찍기에 몰두하던 그녀는 우연히 한강 밤섬에 있는 남자를 보게 된다.
밤섬에 혼자 갇혀 있는 남자는 고립을 고통스러워하기보다 오히려 즐기고 있다. 오리 배를 끌고 와 집을 만들고, 각종 쓰레기를 모아 일용할 생활용품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골프도 즐긴다. '웃기는 짜장' 같은 사람인데, 어찌 보면 그는 자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김씨 표류기'는 영화 중반까지 두 사람의 고립된 생활을 그냥 방치해둔다. 아파트에 고립된 여자 김씨가 자신과 닮은 밤섬의 김씨에게 댓글을 달아주기로 결심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순수한 '혼자만의 세상'에서 행복을 만끽한다.
인간의 스트레스가 대부분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는 그들의 세계는 얼핏 현대의 낙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영화는 관계를 맺지 않고 얻는 행복에 강한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대신, 끊어졌던 관계의 실타래를 슬쩍 연결하고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본다.
관계의 시작은 여자 김씨의 사소한 결심이다. 그녀는 자신과 많은 부분 비슷해 보이는 외로운 생명체에게 60억 지구인을 대신해 댓글을 달아주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암스트롱이 달의 표면에 인류의 위대한 첫 걸음을 내디뎠듯, 세상 밖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초록색 와인 병 안에 'HELLO'라는 댓글이 달린 종이를 말아 넣고, 한강 다리 아래로 희망의 편지를 슬쩍 밀어 넣는다. 그녀의 댓글은 3개월 17일 만에 겨우 남자의 손에 닿는다. 하늘 아래 혼자인 줄만 알았던 남자는 드디어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부끄럽지만 왠지 모르게 행복이 밀려온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오뚜기 케첩통과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훨씬 즐겁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몰라도, 답장이 주야장천 늦어져도, 어떤 답을 어떻게 보내올지 모르는 사람과 소통의 끈을 이어가는 것은 그에게 또 다른 행복으로 다가온다. 관계는 스트레스지만, 한편으론 따뜻한 희망의 언어이기도 한 것일까.
영화는 깡통에 담긴 옥수수 떡잎을 비추며 이야기를 끝맺는다. 관계는 옥수수 씨앗이 나무로 자라나듯, 훗날 거대한 희망이 돼 세상을 촘촘히 연결할 것이다. 두 명의 김씨는 긴 표류를 통해 비로소 관계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자신의 이름으로 처음 인사를 주고받는다. '김씨 표류기'는 그 길고 어려운 첫 인사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영화다.
※더 생각해볼 문제
1. 영화 속 두 명의 김씨처럼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자신의 생각을 적어보자.
2. 소설 '로빈슨 크루소'와 이 영화는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주제는 많이 다르다. 두 작품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보자.
[영화와 논술]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김씨 표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