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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最高)의 사찰, 호류지(法隆寺)는 불교미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594~710년)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아스카 시대 당시 선진문화인 한국과 중국의 제도, 문물 등을 수입해 국내의 제반 체제를 개혁한 시대이다. 시대 구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쇼토쿠 태자의 섭정시대를 중심으로 한 시대라는 설이 통상적이다. 쇼토쿠 태자는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관료제를 정립했으며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헌법17조를 만들어 천황의 절대적 지위를 확립했다.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도 이 시대부터 쓰였다.
쇼토쿠 태자는 백제 왕실과 인연이 깊다. 백제의 아좌 태자(阿佐太子)가 바로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를 그린 스승이었고, 유교와 불교를 비롯해 건축, 조각, 회화 등의 대부분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학자, 승려, 백제의 유민(遺民) 등에 의해 전수됐다. -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의 자취
호류지에는 한반도와 관련된 작품이 많이 남아 있다. 일본 제1급의 국보인 호류지의 본존인 '석가삼존상'과 '약사여래좌상'(623년 제작)도 백제인의 후손인 구라쓰쿠리노 도리(鞍首止利)의 작품이다. 호류지에 있는 또 다른 국보인 '백제관음보살상'(7세기 중엽 제작)도 백제와의 연관성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이 그렸다고 알려진 금당(金堂)벽화가 있다. 일본의 정사기록서인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일본에 '조지묵채(造紙墨彩)'의 법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담징은 610년 3월에 승려 법정과 함께 일본에 파견됐다. 그는 오경(五經)을 알았고, 채색과 종이와 먹을 만드는 방법, 맷돌 만드는 방법을 일본에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호류지의 금당 건물은 670년에 소실돼 710년경에 재건된 것이다. 따라서 금당벽화는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다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담징이 610년에 일본에 가서 체류한 것은 사실이나, 700년대 초까지 살아 있으면서 금당(金堂)이 완공될 당시에 벽화를 그렸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화재로 금당벽화 잃은 일본, 최첨단 문화재 보호 시스템 마련
금당 벽화는 8세기 무렵의 중국 당나라 불화양식을 보여주는 매우 세련되고 수준 높은 작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49년 1월 26일 화재로 일보 국보인 금당벽화 대부분이 소실됐다. 이 사건에 큰 충격을 받은 일본은 1955년부터 매년 1월 26일을 '문화재 방화(防火)의 날'로 삼아 대대적인 소방훈련을 실시한다. 훈련은 전국에서 이뤄지며 문화청과 소방청 장관이 직접 주요 현장을 시찰, 감독한다.
주요문화재 인근에는 물 저장 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하고, 문화재 주변에 설치된 분무기로 물을 뿜어 물안개가 일종의 커튼 역할을 하는 첨단 방화시스템도 도입했다. 일본은 이렇게 1950년대부터 문화재 화재 피해를 막기 위한 국가 차원의 시스템 마련에 공을 들여왔기에 이후 문화재 소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다. -
※더 생각해볼 거리
2008년 2월 10일 우리나라 국보 1호인 숭례문이 방화로 완전 전소된 사건이 발생했다. 경비시스템과 소방시스템 모두 전무한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낮 뜨거운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 행정에 대한 문제점과 개선책을 제시해보자.
[명화로 보는 논술] 호류지 금당벽화
담징이 그린 佛畵… 채색·먹만드는법 日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