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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예슬, 대학 자퇴 선언
대학교 입학식을 치른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학생인 김예슬이 대학 자퇴 선언을 했다. 그녀는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를 남겼다. 선언을 적극 지지하는 대자보가 옆에 붙여지고, 〈김예슬 선언〉이라는 까페가 만들어졌다. 한 편에서는 내용을 접한 동료 대학생들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자신들의 마음을 도려내는 내용이라고 지지한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좀 더 실력을 쌓는 데 매진하라며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선언을 계기로 대학생들, 교수들, 이제 곧 대학생이 될 고등학생들, 자식을 둔 부모들이 비슷한 감정을 쏟아내며 교육을 포함한 우리나라 시스템 전반에 대해 반추하는 시간이 마련되고 있다. 그가 쓴 문구〈큰 따옴표로 표시함〉를 여러 가지 차원에서 분석하면서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조명해보자.
◆ 자퇴 선언의 정치적 의미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주어진 자유, 즉 소극적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이성적으로 결정한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이에게 필요한 적극적 자유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떡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1848년 자본주의 모순점을 지적하며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찾고자 했던 마르크스의 선언에 빗대어 '신(新)공산당 선언'이라 부를만하다. 조용히 혼자 자퇴할 수도 있었지만 대자보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했는데, 이것 자체가 정치적 행위이다. 스티브 잡스가 즐겨 읽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라는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새 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 천국을 온통 분노케 하며, /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이번 자퇴 선언이 비록 작은 울림일지라도 이것을 통해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고 있다.
◆ 자퇴 선언의 경제적 의미
"G세대로 빛내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고용 없는 성장, 청년 실업의 현실 속에서 처절하게 몸부림하는 모습이다. '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다.'라는 대통령의 발언은 기업의 경영 철학이 국정 철학을 대신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천만 원 이상의 등록금, 학자금 대출, 아르바이트 삶 등 이력서에 한 줄 넣기 위해 감수해야만 하는 경제적 고통 속에서 대학은 돈벌이에 나섰다고 비판한다.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제품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기업이 세계의 중심이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대학이 있고, 바로 그 밑에서 국가의 교육체계가 운영된다고 본다. 토머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라는 책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미국 연방정부를 인수한다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소개되어 있는데 같은 맥락이다.
◆ 자퇴 선언의 사회문화적 의미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브레이크 없는 자전거를 타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계속 페달을 돌려야만 하는 신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에는 신들을 우습게 여기고 신의 일에 쓸데없이 간섭한다는 죄목으로 죽음을 통치하는 신인 하데스로부터 가혹한 형벌을 받는 시시포스가 나온다. 그는 밑으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기 위해 영원히 그 일을 반복한다. 성공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삶의 고뇌가 없겠지만 다시 그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 인간의 삶은 비극적이라는 것을 카뮈는 지적한다. 오늘날의 대학생들도 매일 똑같은 공부를 하는데, 그 운명 역시 시시포스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공부만 잘 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그레고르를 통해 현대인들에게 존재의 의미를 찾을 것을 권한다.
◆ 자퇴 선언의 교육적 의미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 " 대학은 인성을 길러주고, 개성을 살려주는 곳이 아닌 객관적 성적으로 줄을 세워주는 곳으로 전락했다. 어학연수, 교환학생, 휴학, 제2전공 의무화, 영어강의확대, 상대평가제도 등, '교수와 학생의 공동체'라는 대학 본연의 모습은 사라졌다. 가수인 핑크 플로이드의 〈벽(The Wall)〉이라는 영화에서는 '거짓 교육은 싫어요. 꼭두각시 교육은 싫어요. 선생님, 우릴 그냥 내버려 두세요.'라며 획일화 교육을 반대한다. 벽은 아이들의 다양한 가능성을 차단하고 여러 존재와 소통하는 통로를 막는다. 아이들은 오히려 더 높은 벽을 만들며 자신의 가치를 애써 찾고 위로한다. 서태지는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에서 "됐어, 이제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며 현실 교육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자퇴 선언 속에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현재를 잡으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외치는 키팅 선생님의 목소리가 전해져 온다. 미술대학에 안 가도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경영학과에 안 가도 사업을 할 수 있는 체제라면 대학은 우정과 진리와 정의가 있는 곳으로 되살아날 것이라고 외친다.
[시사이슈로 본 논술] 자퇴 선언, 한국의 구조적 모순 드러내는 작은 울림 되다
김예슬, 대학자퇴선언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