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을위한철학카페] "나의 흔적 지워달라"… 마지막까지 실천한 無常과 無我
문우일 세화여고 교사·'철학, 논술에 딴지 걸다' 저자
기사입력 2010.04.15 02:57

법정스님 유언에담긴 의미

  • '무소유' 법정 스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오래'다. 복잡한 정치 관련 사건은 접어두더라도 김길태 검거, 천안함 침몰, 최진영 자살 등 최근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사건이 계속 터지다 보니 실제로 그분이 입멸(入滅)하신 지 오래지 않음에도 참으로 옛일처럼 돼버렸다. 그나마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몇 가지 사건들이 없었다면, 벌써 그분을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조차 사람들에게서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스님이 남긴 유언 중 속인들의 관심을 끈 것은 두 가지였다. 당신께서 쓰신 모든 책을 절판하고 남은 것은 소각하라는 것과 당신의 책을 과거 자신에게 새벽마다 신문을 전달해주던 소년에게 전달하라는 것. 물론 참 아깝다. 그리 훌륭한 자산의 흔적을 모두 없애라는 스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 속인(俗人), 그것도 불자도 아닌 사람이 그 유언의 속뜻을 살피고 평가하는 일은 마치 참새가 봉황의 뜻을 아는 듯 떠드는 격이지만, 불교사상에 대한 몇 가지 조각들을 통해 어림짐작해 보는 정도는 큰 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불교 사상은 현실적 삶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기본 줄거리로 하고 있다. 속인들의 생활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이해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강조한다. 나아가 문제에 적절한 처방을 내리기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이 필요한데, 이에 대해 불교는 '집착'을 그 답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집착은 무지(無知), 즉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순서대로 풀어보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해서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게 되고, 그와 같은 집착이 결국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우선의 조건은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다. 이를 올바로 아는 것이야 말로 고통의 사슬을 끊는 첫 단추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이는 불가의 '삼법인'이라는 핵심 사상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불가의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 그리고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세 가지 진리를 강조한다.

    제행무상이란 모든 현상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지칭하며, 제법무아는 고정된 영원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고, 일체개고는 앞선 두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고통 속에 살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중 무상(無常)과 무아(無我)가 바로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두 가지 진리가 된다. 즉 우리 모두는 모든 것이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실 그렇다. 우리가 명문대에 들어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려는 것은 모두 '무상(無常)'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 대학의 위용이, 그 회사의 영업실적이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지우기란 참으로 어렵다. 첫 눈에 반한 이상형의 몸과 얼굴이 조만간 '쭈구렁 망탱이'가 될 수도 있음을 분명히 안다면, 우리는 외모지상주의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뭐 눈에 보이는 것이 그렇게 변한다고 한들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겉모습이 아닌 바로 '그 사람 자체'라고. 하지만 불교의 '무아(無我)'가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겉모습은 아기 얼굴에서 젊은이의 얼굴로, 또 할아버지의 얼굴로 바뀌어도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사람 자체'인 한, 우리 사랑의 대상은 영원히 남는다. 하지만 어제의 '나(혹은 그)'와 내일의 '나(혹은 그)'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집착도 사랑도 욕심도 다 필요 없는 것이 된다. 손에 쥐어봤자 그것이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라면, 가지려는 마음 자체가 지나친 욕심이다.

    법정 스님이 남긴 유언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 온당할 듯싶다. 무슨 이유로 속세에 책을 출간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여전히 속세에 남아 있을 때의 일일 뿐, 수많은 집착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는 마당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불자로서 무상(無常)함을 거부하는 허망한 몸짓일 수밖에 없으리라. 구태여 자신의 이름으로 된 흔적들을 남겨서 남김없이 흩어버려야 할 '자아(自我)'를 누군가 붙들고 있게 할 수도 없으리라. 하여 당신께서 남기신 삶의 '찌끄러기'를 몽땅 지워야 한다고 판단하셨을 밖에…. 그럼에도 당신의 흔적을 지워달라는 스님의 마지막 말씀을 뒤로한 채, 요란하게 기념관까지 세워 추모하려는 것은 마치 청개구리가 부모님을 개울가에 묻어 버린 것과 같은 꼴이 되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