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을 위한 철학카페] 개인의 의사 표현도 문화적 기준이 있다
문우일 세화여고 교사· '논술, 철학에 딴지 걸다' 저자
기사입력 2009.09.24 03:13
  • 최근 한 아이돌 가수가 '철없던 시절'에, 그것도 아주 사적으로 했던 말 한마디 때문에 자신의 꿈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짐작컨대 한국에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던 시절이 많이 힘들었나보다.

    그래서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이 땅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단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가 그런 말을 한 것 자체를 그리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살았기에 이 땅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 속에서 어울리는 법을 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가볍게 오고 갔던 말이 누군가에 의해 들춰지고 많은 사람들이 모진 비난을 퍼붓자, 그는 홀연히 이 나라를 등지고 돌아갔다. 이런 결말을 놓고 인터넷에서 여전히 설왕설래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필자는 그 결과를 놓고 왈가왈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이 땅을 등지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어딘가 못내 찜찜하다. 그 찜찜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그와 같은 마음을 느꼈던 적이 또 있었다. 자칭 보수라 칭하는 사람들이 국립현충원 앞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묘를 만들어 놓고 그 분을 상징하는 인형을 부관참시하는 퍼포먼스를 했었단다.

    부관참시란 임금 운운하던, 그리고 무지몽매한 백성들 운운하던 그런 사회에서 살아생전 밝혀지지 않았던 죄, 그 중에서도 하늘의 뜻을 거스른 천인공로한 죄가 죽은 뒤에 드러났을 때, 그 시신을 파헤쳐 참시하는 형벌을 일컫는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런 퍼포먼스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했던 일 중에 부관참시 당해 마땅할 만큼 잘못된 것이 있었다는 점을 강변하는 것이었으리라.

    물론 그들이 당한 피해가 정말로 있었는지, 혹은 정말로 있었다면 어느 정도였는지는 필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퍼포먼스를 통해 그들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는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꼭 그래야만 했을까.

    한 때 '합리성의 시대'라 부르던 때가 있었다. 보기에 따라 다른 견해가 있을 수 도 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우리사회는 여전히 '합리성'에 따라 많은 것들이 이뤄져야만 하는 사회이다. 혹자는 이미 우리사회가 탈현대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므로 합리성과 같은 기준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흔히 '탈현대'로 불리는 시기는 감성이나 의지와 같은 비합리적인 요소를 통해 각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이에 따른 다양성이 강조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극단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따라야 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어느 누구에 대해서라도 하지 못할 말은 없으며, 해서는 안 될 표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탈현대성에 대한 이런 주장은 이해만 있고 실제는 없는 꼴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으나, 실제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응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말이다.

    물론 앞서의 주장과 같이 극단적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주장이 탈현대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사람은 동물이다. 그렇다고 동물처럼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동물처럼 살아가는 것조차 다양한 삶의 양태 중 하나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개별적 감상이나 감정을 도드라지게 강조하려는 시도가 모든 언어와 모든 인간들의 문화적 생활양식을 포기하지 않는 수준에서 이뤄진다면, 이는 사람이 동물과 다른 어떤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는 허물이라 단정하고 평가하는 것은 사람들의 언어와 양식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므로 동물과는 다른 정서적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

    사람들은 모여 산다. 그리고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 중 일정한 패턴을 사회적으로 기억하고 그에 '문화'라는 이름을 붙인다. 사회구성원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도 하고, 또 더 나은 모습을 구성하기도 한다.

    따라서 한 사회의 문화는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상의 격(格)을 정하는 기준이 된다. 이것이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치부되던 '합리성'이 여전히 위력을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그 문화에 준하는 표현일 경우 그것은 수준 있는 것이 되며, 그 문화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천박한 것이 된다. 이처럼 수준 있는 행동과 천박한 행위를 따지고 구분하는 것 역시 합리성 여부를 가리는 것이다.

    삶에 대한 소소한 느낌들이 합리적 정서로 드러나고 자리매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과제라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