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이슈로 본 논술] 반세기만의 정권교체… 그들은 변화할 수 있을까?
강방식 동북고 교사·EBS 사고와 논술 강사
기사입력 2009.09.10 02:50

일본의 선거혁명과신(新)일본 탄생

  • 일본 중의원 선거와 반세기만의 정권교체

    8월 30일, 역대 최고의 투표율 속에서 치러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거대 여당이던 자민당이 참패하는 선거혁명이 발생했다. 1955년 창당 이래 54년간 장기 집권했던 자민당은 관료주의 철폐, 서민을 위한 복지정책, 아시아 공동체 추구 등의 공약을 내걸었던 민주당에게 여당 자리를 내줬다.

    전체 480석 중 자민당이 300석에서 119석으로 떨어졌고, 민주당은 115석에서 308석으로 3배 정도 많아졌다. 최다 의원을 기록했던 자민당 총리들과 장관 출신 후보들이 줄줄이 쓴 잔을 들이켰다. 전체적으로 초선의원이 전체 의석의 1/3을 차지하고, 여성의원도 전체 의석의 1/10로 역대 최고이고, 일본의 고질적 병폐였던 세습의원의 비율도 전체 의원의 1/4에서 1/6로 줄어들었다. 각종 수치를 통해 보면 일본 국민은 기존 정치를 바꿔서 새로운 일본에 대한 기대감을 표로 나타냈다.
     

    일본의 선거혁명이 일어난 원인

    자민당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조성된 냉전 체제와 고도 경제 성장의 열매와 함께 역사를 같이 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구소련 및 동구 공산권의 몰락으로 냉전체제가 실질적으로 해체되면서 자민당의 존립 기반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고이즈미 전 총리의 개혁조치를 통해 일본을 심각한 양극화 사회로 재편했다.

    농촌과 도시 간의 격차를 비롯한 각종 소득 격차가 커지고, 실업자가 증대하고, 사회보장은 축소됐다. 1990년대 이후 부동산 거품 경제가 붕괴되면서 일본은 장기 침체 국면으로 들어갔다. 1인당 GDP 세계 4위를 자랑하던 경제대국이 14위로 추락했다.

    설상가상으로 작년말에 촉발된 미국의 금융위기로 가계소비는 감소하고 디플레이션이 형성되면서 총체적인 경제 위기를 맞이했으나 자민당의 정책 대응 능력은 없었다. 이에 민주당은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처럼 국민을 위한 맞춤형 복지정책을 구체적으로 내놓으면서 서민의 표심을 얻었다.

    자민당의 장기집권은 부패구조를 낳았다. 동경대 법학과 출신들로 상징되는 관료 엘리트들이 모든 분야의 의사결정권을 쥐면서 정치인과 관료 간의 유착구조가 긴밀해졌다. 민주당의 '일본 정치의 중심을 관료에서 국민으로 바꾸겠다'는 슬로건이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원래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기에 정당 내의 파벌 경쟁이 정치적 염증을 낳기도 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 이후 4년 동안 4명의 총리가 국민의 의견도 묻지 않고 파벌 간 담합에 의해 교체됐다. 부모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정치 가문을 형성하는 비율이 자민당은 35%까지 이르면서 정치인들이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마이동풍처럼 흘리고 스스로 정치귀족화 됐다.

     

  • 일본 민주당 대표 하토야마 유키오가 선거유세가 끝나고 지지자들과 환호하고 있다. / 로이터
    ▲ 일본 민주당 대표 하토야마 유키오가 선거유세가 끝나고 지지자들과 환호하고 있다. / 로이터
    일본의 선거혁명의 의의

    정권교체는 첫째, 정치인의 단순한 물갈이 및 정당 교체가 아니라 일본 국민들의 의식 및 생활의 전면적인 변화를 상징한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일본 국민들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행동하는 민주시민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둘째, 정치적 선택의 주안점이 이념에서 정책으로 옮겨갔다. 탈냉전 시대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보다 누가 빵을 더 많이 주는 정책을 만드느냐에 관심이 있다.

     '우리를 따르라'는 권위적인 구호보다 '출산 장려금을 40만엔에서 55만엔으로 올려주고, 공립고교 무상교육 및 사립고교 저소득가구에게 연24만엔을 주겠다'는 공약이 훨씬 매력적이다. 셋째, 이미지 선거가 정착됐다. 자민당의 거물급 정치인과 대적하기 위해 미녀 자객을 공천한다고 해 정치흥행을 일으켰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화려한 볼거리는 정치를 쇼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이는 예전에 화려한 언변과 그럴듯한 정책으로 포장한 정치스타일을 펼쳤던 자민당의 고이즈미 전 총리의 선거정책과 유사하다.


    변화하는 한·일관계 및 국제관계

    민주당은 미국이 이끄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미·일동맹을 주축으로 미국에 의지하던 탈아입구(脫亞入歐) 정책에서 아시아를 중시하는 탈미입아(脫美入亞) 정책으로 노선을 변경하고 있다.

    미국의 국력을 능가하는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성장, 북한핵문제, 한국 및 아시아 국가들과 관련된 민감한 역사적 문제와 경제 협력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일본을 기대할 수가 없는 처지가 됐다.

    이 때 가치관이 다른 사회와 적극적인 공생을 강조하는 '우애정치'를 기본 철학으로 삼는다. 우애는 프랑스혁명의 박애정신으로 경쟁사회의 사회적 약자를 보듬어 통 큰 사회적 연대를 위한 가치로 기능하기도 한다.

    야스쿠니 신사참배, 일본군위안부 문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 등에서 일본 보수 우익의 정치적 입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던 자민당과는 다른 행보가 기대된다. 대결보다는 대화를, 이념보다는 실용을 선택할 것이다.

    비록 정당이 교체됐지만 민주당의 대표인 하토야마 유키오와 대표 대행 오자와 유키오는 원래 자민당에서 정치인 활동을 시작한 보수적인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언제든지 예전의 일본 모습을 확인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 추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내걸었던 대동아공영권의 아픈 기억이 현실화돼 한반도 주변의 패권을 둘러싼 국제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