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보는 논술] 피카소 '파이프를 든 소년'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미술 쟁점-그림으로 비춰보는 우리시대' 저자
기사입력 2009.06.18 03:05

1000억 원에 팔린 가난한 소년의 초상

  • 파블로 피카소, ‘파이프를 든 소년(Garcon a la Pipe)’, 캔버스에 유채, 100×81㎝, 1905, 개인
    ▲ 파블로 피카소, ‘파이프를 든 소년(Garcon a la Pipe)’, 캔버스에 유채, 100×81㎝, 1905, 개인
    그림 한 점이 1000억 원을 넘는다면 믿을 수 있을까? 주인공은 바로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파이프를 든 소년'이다. 이 그림은 2004년 5월 5일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수수료를 포함해 총액 1억416만8000달러에 팔렸다.

    '파이프를 든 소년'을 사고 싶어하는 7명의 입찰자가 경쟁을 벌여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가격이 올라갔다. 장내는 술렁였다가 숨을 죽이기를 반복하면서 얼마에 낙찰될지 긴장이 가득했다. 마침내 "9300만 달러, 수수료 포함, 총액 1억416만8000달러, 패들 넘버 225번, 축하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망치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경매장에 나타나지 않은 전화 속 고객에게 낙찰됐다.

     

  • ◆가난하지만 가장 화려한 왕관을 쓴 소년

    '파이프를 든 소년'은 24살의 피카소가 '장밋빛 시대(1904~1906)'라고 일컬어지는 1905년, 가난한 예술가들의 집합소인 파리의 '세탁선'에서 그린 작품 2점 중 하나다.

    가난한 시절, 서민을 모델로 그린 이 작품은 예술성이 매우 뛰어나고, 1996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딱 한 번 전시됐을 뿐 단 한 번도 경매에 나오지 않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은 덕분에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했다.

    화려한 연애경력,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다작 화가'로 불리는 피카소가 이상하게도 1905년에는 작품 활동이 뜸했다. 이 시기의 작품이 매우 희귀한데다 완벽한 데생 실력과 유화 테크닉을 구사하면서 절제된 표현과 풍성한 감성을 따뜻하게 그려냈기에 작품의 예술성은 최고로 평가받았다. 여기에 안목 높은 소장가로 알려진 존 휘트니 부부의 소장품이라는 점까지 더해져 이처럼 엄청난 가격에 낙찰된 것이다.

    그림 속 주인공은 파리의 빈민들이 모여 살던 지역에 있는 피카소의 작업실에 자주 놀러 오던 루이스라는 소년이다. 인물의 다양한 모습을 소재로 그림 연습을 하던 피카소는 이 가난한 소년의 머리에 반쯤 시든 장미꽃으로 만든 화관을 씌우고 손에 파이프를 쥐여줬다.

    푸른색의 단순한 옷과 대비되는 화사한 분홍색의 벽면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그려 넣었다. 가난하지만 청년으로 커가는 소년의 수줍은 듯 신비로운 표정과 따뜻하고 아름다운 색감의 표현으로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화려한 왕관을 쓴 소년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기록은 또 다른 기록으로 깨지게 된다

    '파이프를 든 소년'은 장밋빛 시대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피카소가 '가난하고 비관적인 운명 속에서도 세상의 낙오자가 되지 않길 바라는' 애정 어린 시선을 담은 그림이다. 이 작품이 최고가로 낙찰되자 경매장 안에는 박수갈채가 이어졌다고 한다. 새로운 주인에게 안겨질 '파이프를 든 소년'에 대한 경의를 보냄과 동시에 이전까지 반 고흐의 '닥터 가세의 초상'이 14년간 유지해 온 '세계최고가 그림' 기록 경신에 대한 축하의 박수였다.

    하지만 기록은 언젠가 깨어지게 마련이다. 경매는 아니지만 2006년 6월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 가운데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1'이 1억3500만 달러에 에스티 로더 그룹의 로널드 로더 회장에게 팔리면서 깨졌다.

  • 최혜원 블루로터스 아트디렉터
    ▲ 최혜원 블루로터스 아트디렉터
    ≫더 생각해 볼거리

    화가에게는 '가난한 예술가'란 수식어가 일반적일 것 같지만, 사실 피카소는 예술가로서의 성공과 부귀영화를 누렸다. 생전에 이미 억만장자 반열에 올랐을 정도. 뛰어난 사교술로 부자들과 친분을 쌓았고 예술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 인정했을 만큼 예술의 상업성을 철저히 이용한 화가였다. 이런 그가 이 '파이프를 든 소년'을 그리던 순간에도 세속적인 욕망에 이용하려고 했을지 대해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