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보는 논술] 엘리자베스 키스 '조선의 아침 안개'
최혜원 블루로터스 아트디렉터·'미술 쟁점-그림으로 비춰보는 우리시대'저자
기사입력 2009.07.23 06:39

조선의 풍경·문화에 매료된 푸른 눈의 화가 '기덕'

  • 영국 출신으로 20세기 초 아시아에서 활동한 서양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97~1956)는 동북아시아, 특히 한국, 중국, 일본을 여행하면서 각 나라의 이국적인 풍광과 생활풍속,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와 수채와, 채색 목판화로 남겼다.

    우리나라를 사랑해 '기덕(奇德)'이라는 한국이름까지 가지고 있었던 엘리자베스 키스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아일랜드에서 보내고 1898년에 런던으로 옮겼다.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화가로서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나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조선을 사랑한 푸른 눈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는 삼일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8일 언니와 함께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3개월간 남북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조선의 아름다운 풍경과 인간미 넘치는 조선인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1924년에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다시 1932년부터 1936년 사이 아시아를 찾으면서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녀는 한국 밖에서 한국을 담은 작품으로 전시회를 연 최초의 서양화가였다. 일본 도쿄에서 한국과 한국인을 선보이는 작품 전시회를 열었고, 일제강점기인 1920년 초 서울에서도 개인전시회를 가졌다. 그 뒤 런던, 파리, 호놀룰루 등에서도 한국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20세기 초 아시아의 모습, 특히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문화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책도 3권이나 출간했다. 특히 판화작품과 함께 기행문을 남겼는데, 형부의 도움을 받아 언니가 글을 쓰고 자신의 그림을 실은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원제 Old Korea)'가 가장 유명하다. 이 책에 실린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 66점은 한국의 아름다운 풍광과 다양한 풍습을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우리가 잘 모르는 일제 강점기 당시의 아픈 생활상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푸른 눈에 비친 옛 한국의 모습

    엘리자베스 키스는 서울 동대문 등 건축물과 원산, 평양 대동강변의 풍경과 금강산 풍경 등을 멋지게 담아내면서 다양한 계층, 직업의 한국인 모습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그림들과 함께 짤막한 설명을 곁들였는데 '한국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다워 때때로 여행객은 기이한 감동을 맛보게 된다' '한국인의 자질 중 제일 뛰어난 것은 어엿한 몸가짐이다' '한국의 가정 내에서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하대를 당하지만 삼일만세 운동 때는 여자들도 남자 못지않게 잘 싸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중 함경남도의 원산을 그린 몇 작품이 눈에 띄는데 '조선의 아침 안개'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한국의 풍경과 문화에 매료됐는지를 잘 알 수 있다.

  • 엘리자베스 키스, '조선의 아침 안개', 다색 목판화, 37×24㎝, 1922년, 개인소장
    ▲ 엘리자베스 키스, '조선의 아침 안개', 다색 목판화, 37×24㎝, 1922년, 개인소장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원산(元山)의 아름다움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번에 운 좋게 머물게 된 이 집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세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집주인인 여자도 너무나 친절하다. 이 땅의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이란…. 별조차 새롭게 보인다. 그림 그릴 곳을 찾아다니다가 나는 가끔 멈춰 서서 이 땅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만끽하곤 한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조금만 가면 금강산 입구인데, 눈을 들어보면 끝도 없이 산들이 중첩해 있다. 이른 아침에 계곡을 내려다보면 아침 안개, 아니 밥 짓는 연기 같은 것이 올라오는데 소나무 타는 향기가 섞여 있다."

    이렇듯 엘리자베스 키스는 단순한 이국적 취미로 한국을 그려낸 것이 아니다. 아시아 변방의 작은 나라를 깔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마음속 깊이 인식했고, 따스한 인류애의 시선으로 낯선 문화를 적극적으로 화폭에 옮긴 것이다.

    ※더 생각해볼 거리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비롯해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찾은 서양인들이 아시아의 변방인 한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여러 가지 사례와 함께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