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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국외대 사회계열을 졸업한 문지영(26‧여, 가명)씨는 고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과공부를 이외 시간에 ‘경력 관리’에 매진했다. 문씨는 입학사정관전형(현 학생부종합전형)에 지원하려고 고교 3년 내내 반장을 도맡았고, 지역에서 개설한 리더십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하지만 경쟁자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론 어림도 없었다. 시 소속 고교생 기자직에 지원해 공부하는 틈틈이 취재하고 기사를 써냈다. 크고 작은 단체의 봉사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바람과 달랐다. 문씨는 2011학년도 대학 입시에서 입학사정관전형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정시모집으로 대학에 간 문씨가 느끼기에 고교시절 경력 관리는 ‘실패’였다. 대학에선 경력을 더 열심히 쌓았다. 세계를 누비며 한국어를 가르치는 봉사대원이 되고 싶었던 문씨는 교내 신문사에서 수습기자 활동부터 시작했다. 2년 6개월여 학생기자 일을 하면서 세계구호단체에서 봉사활동도 했다. 학생기자를 마치자마자 한 대학연합봉사단체에서 8개월간 봉사활동과 기자 일을 겸했다. 이후 여행사에서 아르바이트(6개월)로 서비스마케팅 업무를 했고, 곧바로 카자흐스탄으로 떠났다. 현지에서 한국어교육과 간단한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6개월 과정의 인턴이었다.
지난 4월 첫 직장에 들어가기까지 ‘경력관리’는 국내외를 오가며 쉬지 않고 이어졌다. 문씨는 “외부활동으로 경력을 쌓지 않으면 늘 불안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인지 문씨는 지금도 경력관리를 위해 한국어교원자격증 준비반에 소속돼 있다. 퇴근 후 ‘주 3회’ 모임을 갖는다. 끊임없이 경력을 쌓아왔지만 문씨는 스스로 “성공해본 적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취업에 도전해 수차례 고배를 맛보면서 이런 마음은 더 확고해졌다. 수업은 안 들어가도 외부활동만큼은 빠지지 않았던 문씨는 지난 10여년간 달려온 ‘경력관리’를 이렇게 정리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국내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경험을 쌓았지만, 입시와 취업이라는 ‘경쟁’ 속에 놓이면 결국엔 ‘스펙싸움’이라는 것. 문씨가 최종면접에서 만난 경쟁자들의 기본 자격은 ▲토익 900점 이상 ▲토익스피킹 레벨7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 ▲컴퓨터활용자격증 1급 등이고, 여기에 어학연수, 교환학생, 해외 인턴십, 봉사활동과 같은 ‘경험’이 줄줄이 더 있다. 문씨는 “남들 내신‧학점 관리할 때 활동에 매진할 만큼 고교 때부터 지금까지 경력관리만 해왔는데 (나보다 더 화려한 경력자들을 만나니) 허탈했다”며 “요즘 경력은 ‘나만의 이야기’가 중심이라고들 하는데, 실제 면접장에 가보면 경력이 많을수록 ‘스토리’도 풍부해 경쟁력이 있어 보였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경력을 경쟁하고 그 안에서 ‘스토리텔링’까지 해내야 하는 요즘 학생들은 말 못할 고민에 빠져 있다. 최근 정부가 대학입시에서 ‘학생부종합전형(이하 학종)’을 확대키로 했고, 동시에 취업정책으로 ‘블라인드 채용’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비교과 활동을 반영하는 학종, 인턴 등 유관 경력을 중시하는 블라인드 채용이 확대되면 많은 학생들이 지금 보다 더 ‘스펙(specification, 경력) 쌓기’에 몰두하는 학생들이 많이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실제로 지난 18일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취준생 997명을 설문한 결과 절반에 달하는 45.1%가 “블라인드 채용이 도입되더라도 ‘자소설’ 등 또 다른 스펙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응답했다. 다음 달 졸업을 앞둔 취준생 곽경식(26‧남, 가톨릭대 상경계열)씨도 “전공과 학점을 평가에 반영하지 않으면 학업에 열중할수록 취업에 불리할 것 같다”며 “일단 남들보다 ‘경험치’에서 앞서기 위해서라도 학업 이외의 활동에 집중하게 될 것이고, 자소서나 면접 등을 보완하려고 사교육 기관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진로‧진학 고민할 시간, 경력 관리에 할애 ‘역효과’
학종과 블라인드 채용이 확산될 경우 중학교부터 대학 졸업때 까지 최소 10년 이상을 ‘경력 관리’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 나타나지 않을까 우려한다. 손동현 대전대 특임부총장(전 성균관대 학부대학장)은 “초중등과 고등교육, 그리고 취업에 이르는 입시‧선발 과정이 학종과 블라인드 채용으로 연결되면서 많은 학생이 진로‧진학을 고민할 시간을 경력관리에 할애하게 되는 ‘역효과’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처럼 취준생과 교육전문가들이 이 같은 역효과를 예견하는 배경엔 학종과 블라인드 채용이 추구하는 인재상의 핵심이 ‘경력과 스토리(나만의 이야기)’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결과보다 과정, 실적보다 경험, 스펙보다 스토리…’ 진학 혹은 취업을 하려고 자기소개서(이하 자소서)를 써본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봤을 ‘경력관리의 원칙’이다. 이 원칙은 자소서를 포함한 서류전형부터 최종 면접 등 입시와 취업의 전 과정에서 적용되는 추세다. 자소서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나만의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성찰적 측면이 강하지만, 이것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 지원자의 입장에선 자기 성찰에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대학입시와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경력, 경험, 스펙’과 같은 각각의 평가요소를 빠짐없이 갖춰야한다는 부담까지 안고 있다. 예컨대 학종이나 블라인드 채용 전형의 취지가 ‘화려한 경력보다는 소소한 경험이라도 얼마나 자기화 했는지를 평가한다’는 데 있다고 해도, 경험 경쟁을 해야 하는 지원자 입장에선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탓에 지원자들 사이에선 ‘경력, 경험, 스펙’ 등이 혼용된다.
모든 평가요소를 남들보다 더 많이 갖춰야 한다는 불안심리는 입시와 취업을 위해 사교육기관을 찾게 만드는 요인으로 지목돼 왔다. 경력과 인성, 태도 등 ‘자신만의 이야기’조차 치열한 경쟁 속에선 사교육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학종의 전신인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한 2007년부터 ‘나만의 이야기’와 학교교육 내실화가 강조돼왔지만, 사교육비는 매년 늘고 있다. 이는 ‘경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통계청이 지난 4월 발표한 ‘2017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고교생의 사교육 참여율 52.4%, 학생 1인당 월평균 26만2천원을 지출했다. 통계를 수집한 2011년과 비교해 사교육 참여율은 0.8%p(월평균 4만4천원) 더 늘었다. 2013년부터는 사교육 참여율과 비용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대학생들의 취업 사교육 실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최근 취업포털 ‘사람인’이 취업준비생 28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취업 사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응답자는 31.8%에 달했다. 이들은 주로 자소서 첨삭, 모의 면접과 같은 ‘취업 컨설팅(35.6%)’과 ‘직무 관련 전문교육(34.4%)’을 받고 있었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화학과)는 “경력 관리는 고위 공직을 준비하는 극히 일부의 성인들에게 요구해야 하는데 학생 모집과 신입사원 선발에 무분별하게 적용되고 있다”며 “중고교생과 대학생은 다양한 경험 속에서 스스로 진로를 결정하도록 기다려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학종과 블라인드 채용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평가한다고 하지만 인재 선발은 결국엔 ‘경험 경쟁’이 되기 때문에 진로를 빨리 정해서 (지원할 분야의) 경험을 많이 하는 쪽이 유리한 구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내년부터 민간기업으로 확산… 대학교수들 “누가 내 수업 들을까” 걱정
대학입시와 취업에서 경력관리가 1순위로 떠오르면서 대학교수들은 고민이 깊다. 특히 블라인드 채용에서 대학의 ‘학점’까지 요구하지 못하도록 한 규정은 교수들이 가장 우려하는 대목이다. 블라인드 채용으로 인해 교권과 교육이 일시에 무너질 것이라는 전망을 한 이덕환 교수는 “자칫 학생들에게 ‘공부하지 말라, 열심히 공부할 필요 없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예측했다. 순수미술계열의 손정은 경희대 교수(조소과)도 “학생들의 관심이 취업 준비에 쏠린 현실에서 그나마 학생들의 눈길을 강의실에 잡아둔 건 평가권(학점)이었다”며 “취업기관에서 학점을 평가하지 않는다고 하면 대학 강의실은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손 교수는 “경력 경쟁을 해야 하는 학생들이 제도에 맞춰 기형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큰데 이를 보완할 방안이 정부에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5일 정부가 발표한 ‘평등한 기회‧공정한 과정을 위한 블라인드 채용 추진 방안(블라인드 채용)’에 따르면, 입사지원서에 학력을 기재할 수 없지만, 직무 수행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정될 경우 신체조건 등을 요구할 수 있고, 업무와 직결된 필수이수과목이 있다면 해당 과목의 학점을 제출토록 하는 등 예외조항을 두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한 담당자는 “특정분야에 취업하려면 직무 연관성이 있는 학교 수업을 받아야 하고 필요에 따라 특정 과목의 학점을 요구할 수 있다”며 “학교 수업을 등한시하고 해당 분야에 취업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정부가 제시한 블라인드 채용은 지원자의 모든 정보를 가려놓고 채용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전공을 특정 짓거나 제한을 두지 말라는 취지가 강하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정부는 이번 공공부문 블라인드 채용계획을 발표하면서 민간기업 확산정책도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정부는 조만간 ‘채용공고-입사지원서-필기‧면접’ 등 채용 전 과정의 이행내용을 규정한 ‘기업 블라인드 채용 가이드북’을 민간기업에 배포할 예정이다. 올해 안에 이 제도의 도입을 희망하는 중견‧중소기업(약 400곳)에 컨설팅과 인사담당자(1천여 명) 교육도 지원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올 하반기 채용 관행에 관한 점검결과와 개선사항을 발표하기로 해 이르면 내년부터 민간기업까지 확산될 전망이다.
[기획]학종부터 블라인드 채용까지…지금은 경력 강요 사회
-비교과 활동 반영하는 학종, 유관 경력 중시하는 블라인드 채용…“결국엔 경력경쟁”
-“경험 많아야 나만의 이야기도 풍성해”…취준생들 “사교육 불가피”
-경력 찾느라 학과 공부는 소홀히…교수들 “대학 강의실 붕괴 우려”